아일랜드 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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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일랜드 요리는 아일랜드의 역사와 문화를 반영하며, 시대와 사회 계층에 따라 다양한 변화를 겪었다. 초기 아일랜드에서는 꿀이 중요한 식재료였으며, 청동기 시대에는 돌구이를 이용한 조리법이 사용되었다. 바이킹의 영향으로 육류와 해산물 섭취가 늘었고, 중세 시대에는 계층에 따라 섭취할 수 있는 음식에 차이가 있었다. 16세기 감자 도입은 아일랜드 식단에 큰 변화를 가져왔으나, 감자 역병으로 인한 아일랜드 대기근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식민지 시대에는 영국에 식량을 공급하는 역할을 했으며, 미국 이민을 통해 아일랜드 요리는 새로운 변화를 겪었다. 현대에는 다양한 국가의 요리가 유입되었고, 전통적인 재료를 활용한 새로운 아일랜드 요리도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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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 요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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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언어 | 아일랜드어 영어 |
음식 문화 | 아일랜드 문화의 일부 |
관련 주제 | 아일랜드 요리 관련 주제 목록 |
주요 요리 | |
주요리 | 바름브랙 블라 복스티 챔프 치킨 필렛 롤 코드 콜캐넌 크루빈스 드리신 구디 아이리시 스튜 아이리시 브렉퍼스트 아이리시 위스키 잠본 스파이스 백 양념 쇠고기 |
역사적 영향 | |
역사적 영향 | 감자 기근 영국 요리 |
요리 변화 | 전통 요리법의 변화 음식 재료 및 조리법 변화 |
식재료 | |
주요 식재료 | 감자 곡물 (특히 귀리, 보리) 유제품 해산물 육류 (특히 쇠고기, 돼지고기, 양고기) |
식사 | |
식사 문화 | 푸짐한 식사 따뜻한 식사 선호 가족 중심 식사 |
전통 요리 | |
전통 요리 특징 | 단순한 조리법 신선한 재료 사용 지역적 다양성 |
현대 아일랜드 요리 | |
현대 아일랜드 요리 특징 | 현대적 조리법 도입 국제 요리의 영향 고급 요리 발전 |
음료 | |
음료 | 기네스 아이리시 위스키 아이리시 커피 홍차 |
지역 특산품 | |
지역 특산품 | 해산물 요리 (해안 지역) 양고기 요리 (산악 지역) 유제품 (농업 지역) |
추가 정보 | |
관련 정보 | 아일랜드의 음식 문화에 대한 참고 자료는 다양한 학술 자료에서 찾아볼 수 있음 음식 관련 행사 및 축제 존재 |
2. 초기의 아일랜드 요리
초기 아일랜드 문학에는 음식과 음료에 대한 많은 묘사가 나타난다. 특히 꿀과 벌꿀주는 식사 장면에 자주 등장하지만, 실제로는 매 끼니마다 그것들을 먹을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을 것으로 보인다.[6] 아일랜드 신화와 초기 아일랜드 문학에는 핀 막 쿠말과 지혜의 연어 이야기처럼 음식과 음료에 대한 많은 언급이 있다.[5]
아일랜드에서는 풀라흐트 피아드(청동기 시대의 조리 유적)가 발견되었는데, 돌구이를 이용하여 사슴고기 등을 삶았다고 한다. 맥주 양조에 사용했다는 설도 있다.
더블린 해안의 바이킹 유적에서는 소, 돼지, 양, 닭, 거위, 물고기, 개암나무를 비롯한 견과류, 야생 베리, 메밀과 명아주 씨앗을 죽으로 만들어 먹었던 흔적이 발견되었다.
중세 농노제하에서 농민들은 소를 생산하도록 강요받았고, 생산된 쇠고기는 귀족과 부유층만이 소비했다. 농민들은 귀리, 보리와 우유, 버터, 치즈 등의 유제품, 고기로는 소의 내장과 돼지발, 블랙 푸딩(피 소시지) 등을 먹었다.
16세기에 감자가 들어오면서 주요 작물이 되었으나, 1845년부터 1849년까지 유럽 전역에서 발생한 감자 역병으로 아일랜드 대기근이 발생하여 약 100만 명이 굶어 죽고 200만 명이 해외로 이주하게 되었다.
식민지 시대 아일랜드는 잉글랜드에 곡물과 육류 등의 식량을 공급하는 곳으로 이용되었고, 아일랜드 대기근 중에도 그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아일랜드 요리에서는 돼지고기 사용이 일반적이지만, 미국으로 건너간 아일랜드계 이민자들에게 돼지고기는 구하기 어려웠고, 쇠고기가 적당한 고기였기 때문에 콘비프의 이용이 일반화되었다. 콘비프 앤 캐비지는 미국의 성 패트릭의 날 음식으로 자리 잡았다.
2. 1. 중석기 시대 (기원전 8000년 - 기원전 4000년)
농업 기술이 발달하기 전 아일랜드의 중석기 시대는 석기, 뼈 조립품, 고고식물학적 증거, 인간 골격 유적의 동위원소 분석, 그리고 인간 치아의 치아 마모 등의 고고학적 증거를 통해 다양한 식물과 동물을 섭취하는 수렵 채집 사회였음을 알 수 있다.[7][8][9] 뼈 조각[10]과 조개껍데기[11]와 같은 식품 부산물의 발견은 중석기 시대 아일랜드인의 식생활을 이해하는 중요한 지표인데, 당시의 식재료는 오래전에 분해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12] 특히 아일랜드의 대부분이 산성 토양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13][14][15]하지만 남아있는 식품 유적과 중석기 시대 식량 채취 도구[16]의 발견, 그리고 지역 환경과 유적지와의 관계[13]를 통해 당시 아일랜드인들이 무엇을 먹었는지 이해할 수 있다. 특히 유적지는 중석기 시대 아일랜드인의 식생활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통찰력을 제공한다.[13] 예를 들어, 중석기 시대 유적지가 수계 근처에 위치한 것은 해양 생물을 섭취했음을 시사한다.[17] 중석기 시대 아일랜드 유적지의 대부분이 수계 근처에 위치해 있다는 사실은 식물, 해양 생물, 그리고 소형 포유류가 풍부한 식단을 암시한다. 이는 영국이나 북미 원주민과는 대조적인데, 이들의 내륙 유적지는 고기 중심의 식단을 암시하기 때문이다.[13][11] 예를 들어, 사슴은 고고학적 발견에서 거의 나타나지 않는데, 이는 해안 지역, 만, 하구에서 사슴을 보기 어려웠기 때문으로 추정된다.[13]
이러한 유적지의 의도적인 위치 선정은 특정 식품에 대한 문화적 선호도를 보여준다.[11] 또한 수계 근처에 위치한 유적지의 특징적인 요소는 이매패류 껍데기의 거대한 더미인 쓰레기 더미인데, 이는 조개류가 중석기 시대 아일랜드인의 식생활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보여주는 명확한 증거이다.[18] 조개껍데기 더미는 아일랜드에서 자주 발견되는 중석기 시대 유적의 특징이며, 대부분 굴과 삿갓조개 껍데기로 구성되어 있다.[11] 슬라이고(아일랜드어 ''Sligeach'', "조개가 풍부한 곳"이라는 뜻)라는 해안 도시의 이름은 강과 하구에 조개류가 풍부했던 역사와 이 지역에 흔했던 조개껍데기 더미를 반영한다.[19][20]
아일랜드가 섬이라는 지리적 위치와 독특한 생물 다양성과 지형은 중석기 시대 아일랜드인들이 인근 지역의 사람들과는 다소 다른 식단을 즐겼음을 시사한다.[21][22][9] 예를 들어, 선사 시대 아일랜드에는 소형 포유류가 부족했고,[23] 다른 중석기 시대 공동체에 중요했던 붉은사슴, 투우, 엘크와 같은 종이 없었다.[11][9][22] 이는 독특한 식생활과 영양 기준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멧돼지[24][9]와 같은 특정 종의 지속적인 증거는, 곰[25]이나 맹금류(중석기 시대 뼈 조립품에서 발견되었지만 인간 뼈의 동위원소 분석에는 나타나지 않음[9])와 같은 다른 동물 유해의 희소성이나 조리되지 않은 상태와 대조된다. 이는 특정 동물을 식량으로, 다른 동물은 (유럽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26][27]) 상징적이거나 약용으로 사용했음을 시사하며, 개와 같이 전혀 섭취하지 않았던 동물도 있다.[9]
아일랜드의 지리적 특성과 중석기 시대 유적지의 위치 때문에 중석기 시대 아일랜드인이 이용할 수 있는 식량 자원의 다양성은 독특했다.[11][13][9] 멧돼지를 제외하고, 늑대, 불곰, 스라소니와 같은 대형 포식자는 고고학적 조립품에서 드물게 발견되며, 대부분의 중석기 시대 유럽과 마찬가지로 식량으로 이용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11] 마찬가지로, 곡물은 소화를 위해 필요한 가공 과정 때문에 아직 섭취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지만, 균류, 뿌리, 잎, 줄기, 꽃, 견과류, 씨앗, 열매는 수확하고 먹기가 쉬웠을 것이며, 중석기 시대 식단에 영양적 다양성과 풍미를 더했을 것이다.[11]
이는 수로를 따라 위치한 유적지의 빈도와 결합하여 중석기 시대 아일랜드인의 주요 식량은 해양 및 식물성 식량이었음을 시사한다. 또한, 초기 중석기 시대 이주민에 의해 아일랜드로 가져온 멧돼지[24]가 동물 뼈의 고고학적 조립품에서 자주 발견된다는 것은 중석기 시대 아일랜드인 식단에서 또 다른 주목할 만한 주식이었음을 나타낸다.[10][9][24] 아일랜드의 습한 날씨와 산성 토양으로 인해 식물 기원 유물이 부족하지만, 인간 뼈의 생화학적 분석을 통해 사과, 넌틀베리, 산딸기, 블랙베리, 수련 씨앗, 덩이줄기, 그리고 개암과 같은 다양한 식물성 식량의 섭취를 증명할 수 있었다.[9][28]
중석기 시대 아일랜드와 영국에서 많은 고고학적 조립품에서 개암이 상당히 많이 발견된다는 것은 이 견과류가 중요한 식량이었음을 시사하며,[29][30] 같은 시대 캘리포니아 원주민들이 도토리를 사용했던 것처럼 화폐의 역할을 했을 가능성도 있다.[31] 특히 이 견과류는 겨울철에 땅속에 저장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32] 느릅나무 나무껍질 또한 영양이 풍부하여, 특히 스칸디나비아를 포함한 다른 북부 중석기 시대 유럽 공동체의 식단에서 중요한 식량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33]
아일랜드의 해안 지형에도 불구하고, 고고학적 유적에서 중석기 시대 아일랜드인의 해조류 채취에 대한 증거는 없으며, 심해 종에 대한 증거도 거의 없다.[34] 그러나 아일랜드 중석기 시대 식단에서 조개류와 연안 어류, 특히 연어과 어류의 존재는 주목할 만하다.[13] 물개에 대한 증거가 없는 것은 중석기 시대 스코틀랜드와 대조적인데, 스코틀랜드의 고고학 유적에서는 물개의 중요한 활용을 보여주는 증거가 있다.[34]
중석기 시대 아일랜드인들은 수렵 채집인들이었지만, 쓰레기 더미, 석기와 기술의 발견, 그리고 동물 유해의 계절적 분포는 생계 유지를 위한 환경 관리에 대한 이해를 암시한다.[11][9] 예를 들어, 선택적 사냥과 도태 기술을 통한 멧돼지의 이동과 관리[35][28]는 의도적으로 반가축화된 식량 자원이었을 가능성과 아일랜드 중석기 시대 공동체에 중요한 종이었음을 시사한다.[25][24] 쓰레기 더미의 구성에 대한 연구 또한 이 아일랜드 공동체가 조수의 행동과 각 해양 종의 최적 수확 시기를 이해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17][36] 다른 종류의 조개류는 홍합과 피조개의 경우 조간대 평지, 삿갓조개의 경우 바위 해안선과 같이 다른 환경 조건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다양한 종류의 조개류를 수확하고 이익을 얻기 위해서는 다른 수확 전략이 필요했을 것이다.[13] 또한, 아일랜드 중석기 시대 식단의 고고학적 증거에서 담수, 연안, 연안 해양 생물이 심해 종보다 더 많이 나타나는 것은 심해 사냥 기술 대신 함정과 그물과 같은 연안 어업 기술을 사용했음을 나타낸다.[13][37]
특정 유적지에서 발견된 석기와 석기판-조각과 같은 당시 유행했던 기술은 어류 함정과 같은 기본적인 식량 조달 기술의 건설 및 유지 관리에 있어서의 역할을 시사한다.[16][17][38] 중석기 시대 아일랜드인들이 적극적으로 달팽이 양식을 했을 가능성도 있다.[39]
중석기 시대 식단의 근본적으로 계절적인 성격[11]과 다양한 계절적 식량 채취 활동은 연중 중석기 시대 아일랜드인의 시간과 사회 조직에 영향을 미쳤다.[28] 이러한 활동에는 가장 풍부할 때 계절 식물과 동물을 사냥하고 채집하는 것과, 훈제[40]를 통해 고기와 해산물을 보존하고 견과류와 씨앗을 저장하는 것과 같은 저장 관련 활동이 포함되었을 것이다.[41] 다양한 식물은 1년에 두 번만 열매를 맺고 동물의 이동 패턴은 시간에 따라 변할 수 있기 때문에,[42][43][44] 이러한 식량 채취 활동은 매우 다양했을 것이며 따라서 환경과 동물의 행동에 대한 주의와 이해가 필요했을 것이다.[11]
대부분의 식량은 날것으로 먹었겠지만, 고고학적 증거는 조잡한 형태의 정육[25], 씨앗의 침지[45], 식품을 직접 가열하거나 훈제하는 열처리와 같은 중석기 시대 식품 가공 기술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한다.[40][46] 킬네티어니의 한 유적지에서 재, 탄 껍데기, 생선, 돼지뼈가 파낸 구덩이에서 발견되었는데, 생선뼈의 작은 크기는 꼬챙이에 구웠거나 뜨거운 돌 위에 직접 구웠음을 시사한다.[47] 탄 돌 더미의 존재는 삼발이 위에 세운 꼬챙이 위에서 벌어진 화염이나 흙난로에서 굽는 것과 같은 직접 가열 방법에 중점을 둔 요리 방법을 나타낸다.[48]
2. 2. 신석기 시대 (기원전 4000년 - 기원전 2500년)
아일랜드의 온화한 기후와 습하고 산성인 토양은 유기물을 빠르게 침식시키기 때문에 선사시대 아일랜드인들의 식생활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파악하기는 어렵다.[35][15] 하지만 인골과 토기 파편에서 발견된 생화학적 및 동위원소 분석 결과를 통해 신석기 시대 식단에 대한 통찰력을 얻을 수 있다.[49][50][14] 토기 용기의 점토 기질에 보존된 지질 및 식물 잔류물과 같은 생체지표[14]는 신석기 시대 아일랜드인의 식단에 다양한 동식물이 포함되었음을 보여준다. 여기에는 열매, 잎채소, 덩이줄기, 콩과 식물, 고기, 해산물, 견과류 등이 포함된다. 이러한 것들은 신석기 시대의 농업 발전, 즉 경작지[51], 농기구, 가축 사육과 함께 선사 시대 아일랜드인의 식습관과 식사 행동의 극적인 변화를 보여주는 것으로, 중석기 시대 조상들과는 확연히 다르다.[50]곡물 재배 및 가공과 농업 환경에서의 가축 사육은 엠머밀, 보리, 쇠고기, 돼지고기, 염소고기의 소비 증가를 가져왔으며, 이는 해양 생물 소비의 급격한 감소와 일치한다.[53][14] 엠머밀은 습한 아일랜드의 날씨와 토양에 대한 내성이 강하기 때문에 선호되는 작물로 여겨졌지만, 호밀, 에인코른, 보리와 같은 다른 곡물의 증거도 발견되었다. 다만 그 양은 적었다.[50][54][55] 사탕수수, 옥수수, 수수, 건조한 초원 풀은 최근 몇 세기 동안 아일랜드에 도입되었으므로 신석기 시대 아일랜드인의 식단에는 없었다.[14] 마찬가지로, 귀리의 잔해가 발견되었지만, 유적지에서의 양이 미미하다는 것은 아직 재배되지 않은 야생 식물이었음을 나타낸다. 쇠고기와 양고기를 포함한 새로운 가축은 붉은 사슴과 함께 유럽 대륙에서 아일랜드로 가져온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57] 아일랜드 식단에서 새롭고 점점 더 중요한 종이 되었다. 예를 들어, 많은 양의 탄화된 소뼈가 발견된 울타리의 증거는, 아마도 대규모 공동 모임에서 많은 양의 쇠고기를 요리하고 섭취했음을 시사한다.[58][59][60] 중석기 시대와 마찬가지로 헤이즐넛은 많은 신석기 시대 유적지에서 여전히 흔하게 발견되지만, 청동기 시대로 갈수록 그 존재감은 줄어든다.[49][50]
농업 경영의 도입은 아일랜드 공동체의 새로운 식량 기반에 큰 영향을 미쳤다.[50] 농작물에 대한 관심이 높아짐에 따라 야생 채집의 소비는 감소했지만,[49] 경작지 주변에서 번성하는 새로운 야생 식물에 대한 채집 기회도 생겨났다.[61]
신석기 시대 어망과 어도의 방사성탄소연대측정은 해양 생물의 소비를 암시하지만,[62][63] 발견된 식품의 고고학적 증거는 중석기 시대 아일랜드인의 해양 생물 소비와는 달리 수생 종의 소비가 급격히 감소했음을 보여준다.[53][64][14] 신석기 시대의 농업 발전은 가축, 곡물의 소비 증가와 함께 이러한 감소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되며,[50] 다른 신석기 사회의 유사한 발전과 일치하는 매우 중요한 유제품의 도입도 영향을 미쳤다.[65][66][67][68][67][69]
북서 유럽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농업 방식은 윤작 방식이 아닌 장기적인 구획 관리에 초점을 맞추었으며,[50] 퇴비를 비료로 사용했다.[70][71][50] 요리, 물, 폐기물 관리에 대한 새로운 기술의 등장은 아일랜드어로 ''풀라흐트 피아드''(fulachtaí fia)라고 불리는 초승달 모양의 탄화된 돌무더기인 소각 구덩이의 빈도가 증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데, 이는 소각 및/또는 요리 장소의 잔해로 이해된다.[50][72] 그러나 이러한 모든 발전에도 불구하고, 발굴된 고고학적 유물 중에는 식기, 조리 도구 또는 기타 식사 도구가 눈에 띄게 없었다.[73]
2. 3. 청동기 시대 (기원전 2000년 - 기원전 500년)
아일랜드어로 ''fulachtaí fia''라고 불리는 초승달 모양의 타다 남은 돌 무더기는 방사성탄소 연대 측정 결과, 신석기 시대 초기에 등장하여 청동기 시대에 두각을 나타낸 아일랜드의 조리 유적의 잔해로 이해되고 있다.[72] 중세 시대 문헌에서 ''fulacht''라는 단어는 꼬챙이에 음식을 직접 굽는 것을 의미하지만, 그 기원은 주로 뜨거운 돌을 이용한 간접 조리법에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신석기 시대 유적에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75] 이는 적어도 용어와 그 파생어가 요리 행위를 가리킨다는 것을 시사한다.[76]중석기 시대 유적의 특징인 타다 남은 돌 무더기와는 달리, 중석기 시대 이후 유적은 규암의 중요한 잔해가 특징적이다.[77] 가축의 유적과 가까운 곳에 있는 숯으로 덮인 돌 무더기 외에도 물을 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구덩이가 함께 발견되었다.[40] 이러한 무더기에 속한 돌 중 대부분은 큰 사암 조각이며,[78][58] 가열된 후 물이 담긴 구덩이에 담그거나 땅속에 묻어 음식을 삶거나 찌거나 굽는 데 사용되었던 열 전도체로 이해된다.[79]
유럽 전역에서 비슷한 성격의 타다 남은 돌 무더기가 발견되었지만, 아일랜드에는 이러한 유적이 가장 많이 있어 당시 아일랜드 요리에서 간접 조리법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을 시사한다. 이러한 무더기는 상당한 양의 돌을 특징으로 하는데, 수백 년 동안 반복적으로 사용되었고, 물을 적절한 조리 온도로 가열하는 데 필요한 돌의 양 때문으로 생각된다.[58] 이러한 기술은 당시 유럽 일부 지역에서 일반적이었던 증기탕을 만드는 데에도 이중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80]
''fulachtaí fia''는 일반적으로 상당한 양의 타다 남은 동물 잔해를 특징으로 하므로, 주로 조리 유적으로 사용되었음을 시사한다.[81] 대부분의 ''fulachtaí fia''는 저지대 농경지 및 최적의 사냥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는 유사한 환경에 위치해 있다.[81] 또한 이러한 유적에서 발견된 동물 잔해는 일반적으로 가축의 긴 상완골을 특징으로 하며, 고고학적으로 고기 생산과 관련이 있으며, 현장에서 동물을 가공하거나 도살하고, 해체하여 먹었다는 것을 시사한다.[81][83]
''fulachtaí fia''가 상부 구석기 시대 유럽에서 동물 사육의 발전과 함께 등장했듯이,[84] 열분해 기술은 새롭게 중요해진 가축에 대한 대응으로 등장했다.[40] 이는 모든 유적에서 사냥한 동물 잔해가 부족하고, 양, 돼지, 소 뼈가 널리 퍼져 있다는 점에서 더욱 강화된다.[85][40] 그렇다고 해서 여전히 중요한 적은 수의 사슴 뼈의 존재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83] 마찬가지로, ''fulachtaí fia''에서 해양 생물이 없는 것은[58] 가축의 소비가 증가했음을 시사하며, 생선이 가축과 관련하여 다르게 조리되었을 가능성도 있다.[86][40] 많은 유적에서 말뚝 구멍 무리가 있는데, 이는 한때 삼각대와 꼬챙이를 지탱하여 최근에 죽은 동물의 피를 빼내거나 조리하는 데 사용되었을 수 있다.[87]
청동기 시대의 고고식물학적 증거는 아일랜드의 온화한 날씨와 산성 토양으로 인해 부분적으로 회수하기 어렵지만,[40][35][15] 유적지에서 화석화된 헤이즐넛 껍질이 발견되었고,[58] 가축과 사람 모두에게 사료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느릅나무 껍질의 증거도 발견되었다.[48]
헤이즐넛은 기름을 생산하는 데 사용되었고, 그 과정에서 ''fulachtaí fia''의 가열된 물에서 삶아 천연 기름을 추출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기름은 물 표면에 쌓인 후 걷어내 사용하거나 보관했을 것이다.[74][88][58] 삶는 것이 청동기 시대의 주요 조리법이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 방법은 음식의 칼로리를 잘 보존할 수 있었다.[89][90] 예를 들어, 고기를 삶는 것은 린 고기의 수분을 유지하고, 거친 고기의 지방을 제거하며, 골수를 추출하는 데 선호되는 조리 방법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90]
앞서 언급한 대부분의 ''fulachtaí fia''와 함께 발견되는 긴 얕은 구덩이는 일반적으로 돌, 목재 및 기타 유기물과 같은 단열재로 둘러싸여 있으며,[91] 뜨거운 돌과 식용 재료를 분리하거나 다양한 종류의 음식을 분리하기 위해 설계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칸막이로 나뉘어져 있다.[58] 샘 위나 근처에 있는 도랑의 위치와 땅에 새겨진 관개 수로와의 근접성으로 보아 깨끗한 담수를 선호했고, 사용 후 구덩이를 배수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모래에 파거나 물 근원에서 제거된 다른 구덩이는 지하 오븐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58]
이러한 무더기의 규모와 지형에서의 영속성은 개별 ''fulachtaí fia''가 자주 사용되었음을 시사할 뿐만 아니라,[92] 크고 작은 사회 모임의 중심지였음을 시사한다.[93][58] 이는 많은 양의 동물 뼈,[59] 개발된 정착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상당한 크기의 도랑(많은 양의 음식을 담았을 것으로 예상됨)[94] 등으로 더욱 강화된다. 음식을 준비하는 것과 이러한 화덕을 짓는 것은 오랜 시간 동안 여러 사람이 함께 일해야 완성할 수 있는 노동 집약적인 작업이었을 것이므로, 음식을 조리하는 것은 사회적 활동이었으며, 작업자들 사이에 책임이 분담되었고, 따라서 사회 구조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95][96]
의례 유적은 종종 기념품의 생산과 전시로 표시되므로,[97] 이러한 유적이 때때로 중요한 공동체 모임의 장소였을 것이라는 추측은 기념물, 돌 원형 및 기타 장례 이외의 유물의 발견으로 더욱 입증된다.[98] ''fulachtaí fia''는 주로 간접 조리법(직접 가열보다 훨씬 느리고 오래 걸리는 방법)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만들어진 구조물이므로, 이러한 무더기는 사람들이 오랫동안 함께 먹고 교류하며 시간을 보내기로 선택한 특별한 경우를 위한 장소였을 것이라는 추가적인 이유를 제공한다.[40]
초기 아일랜드 문학에는 음식과 음료에 대한 많은 묘사가 나타난다. 꿀과 벌꿀주는 식사 장면에 자주 등장하는 음식이지만, 실제로는 매 끼니마다 그것들을 먹을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아일랜드에서는 청동기 시대의 조리 유적인 가 발견되었는데, 돌구이를 이용하여 사슴고기 등을 삶았다고 한다. 맥주 양조에 사용했다는 설도 있다.
2. 4. 게일 시대
아일랜드 문학 작품에는 예부터 많은 음식과 음료에 대해 설명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꿀이 예부터 많이 소비되었던 재료인 것으로 보인다.[6] 사슴고기를 요리하는 곳이 따로 있어 물로 고기를 세척하는 곳도 있었으며, 돌을 현대의 가스레인지처럼 뜨겁게 달궈서 조리하도록 했다고도 한다.바이킹이 더블린 인근과 아일랜드로 들어오면서 바이킹 민족의 식단이 상당 부분 도입되었다. 주요 육류로는 양과 소, 돼지가 있다. 야생 거위도 잘 먹으며 해산물을 좋아하는 편이다. 대개 미국이나 캐나다 사람들이 해산물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경우가 많은 반면에 유럽에서 아일랜드인들은 해산물을 선호하는 편이다.
중세에서 17세기 감자가 들어오기 전까지 시골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방목으로 생계를 유지하였는데, 대개는 귀족들의 소유였을 것이다. 우유와 치즈로 만들어 먹고 오트밀과 보리를 주식으로 먹었고, 블랙 푸딩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도입되었는데 여전히 많은 가정의 아침 식사 때 먹는다.
아일랜드 신화와 초기 아일랜드 문학에는 핀 막 쿠말과 지혜의 연어 이야기처럼 음식과 음료에 대한 많은 언급이 있다.[5] 영웅의 몫과 가마솥과 꼬챙이에 구운 고기를 포함한 연회에 대한 많은 언급이 나온다. 아일랜드 신화는 켈트 인도유럽 전통이며 다른 문화의 이야기와 많은 음식을 공유한다. 예를 들어, 꿀은 항상 귀중하게 여겨졌으며, 아일랜드에서 인도에 이르기까지 많은 고대 인도유럽 신화와 의례에 등장하는 음료인 미드를 만드는 데 사용되었다.[6]
접대는 모든 자유로운 토지 소유주들에게 의무 사항이었으며, 왕, 주교 또는 판사를 자신의 집에 환영해야 했다. 초기 아일랜드 음식에 대한 많은 증거는 서기 7세기와 8세기부터 기록된 법률 문서와 시에 존재한다.
주요 식사는 오후나 저녁에 먹었다. 낮 식사는 'díthat'이라고 불렸다. 밤의 식사, 특히 축하 식사는 'feis'라고 불렸으며, 종종 맥주와 함께했다.[99] 주요 조리 도구는 다양한 수프와 스튜를 만들었던 가마솥 (''coire'')이었다.
식사는 빵, 신선한 우유 또는 bainne clabhair와 같은 발효된 우유, 요구르트 또는 치즈와 같은 주식으로 구성되었으며, 보통 야채, 염장 고기 또는 꿀로 만든 'anlann' 또는 'tarsunn'(곁들임, 조미료)이 함께 제공되었지만, 계절 식품의 어떤 종류라도 될 수 있었다. 공공 여관 (''브루이덴'')에서는 고위급 인물이 3개의 'tarsunn'을, 하위급 인물은 1개의 'tarsunn'을 받을 자격이 있었다.
두 개 또는 네 개의 손잡이가 있는 나무 컵인 메서 (아일랜드어로 ''meadar'')는 모임에서 공동 음주 용기로 사용되었다.[100]
16세기 감자의 도입 이전까지, 오트밀, 밀, 보리와 같은 곡물은 죽이나 빵으로 요리되어 아일랜드인들의 주식을 이루었다. 가장 일반적인 빵은 갈아낸 오트밀로 만든 납작빵이었다. 이러한 납작빵은 차파티처럼 매우 얇거나, 스코틀랜드에서 여전히 인기 있는 오트케이크처럼 두꺼울 수도 있었다.
가정용품으로는 반죽통 'lasat', 반죽판 'lecc', 솥뚜껑 'lann', 그리고 솥뚜껑 뒤집개 'lainnéne'가 있었다. 오트밀이 가장 흔하게 사용되는 곡물이었지만, 밀로 만든 빵은 귀족 계급의 사치품으로 여겨졌다. 빵과 우유는 수천 년 동안 아일랜드인의 주식을 이루었다. 라틴어에서 유래한 'tortine'은 작은 빵을 의미한다.
전통 죽은 오트밀, 보리 또는 밀가루를 물, 버터밀크 또는 우유와 섞어 부드러운 농도가 될 때까지 끓여 만든 음식이었습니다. 여기에 짭짤한 버터, 신선한 버터 또는 꿀을 곁들였다.
빻은 밀과 데운 우유를 발효시켜 프루멘티 또는 터키의 타르하나나 중동의 카쉬크와 비슷한 제품을 만들었다.[101] 계란 노른자와 같은 다른 재료를 첨가하여 영양가가 높은 음식을 만들 수 있었고, 말려서 겨울 동안 저장할 수도 있었다.
'menedach'로 알려진 또 다른 곡물 요리는 곡물과 버터를 반죽하여 반죽 형태로 만든 것으로, 특히 엄격한 참회식을 하는 수도사들에게 약효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것은 초기 형태의 루 또는 어쩌면 폴렌타의 한 종류일 수 있다. 빵에 발라 먹을 수도 있었다. 이것은 12세기 아이슬란드 사가 란드나마보크에 기록되어 있는데, 아일랜드 노예들이 이 음식을 만들면서 갈증을 해소한다고 주장하는 내용이 있다. "아일랜드 노예들은 곡물과 버터를 반죽하는 방법을 찾아냈고, 그것은 갈증을 해소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minapak이라고 불렀습니다."

고기는 일반적으로 신선하고 향신료를 넣지 않거나, 소금에 절여 가마솥에 삶았다. 때로는 꿀로 맛을 내거나, 테이블에 담아 찍어 먹기도 했다. 가마솥에 고기를 삶아 만든 스튜 형태의 요리에 대한 묘사가 많다. 한 가지 레시피에는 음식의 색깔을 내기 위해 "보라색 열매"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고기를 살짝 데친 후 나무 꼬챙이에 꿰어 불 위에서 굽는 방식도 있는데, 시시 케밥과 다소 유사하다.
고기 섭취는 수요일과 금요일, 그리고 사순절 동안 일주일에 두 번 금지되었다. 아일랜드어로 수요일을 뜻하는 'Céadaoin'은 첫 번째 금식을 의미하고, 금요일을 뜻하는 'Aoine'은 금식을 의미한다. 정교회에서는 아직도 이 관습을 유지하고 있다.
사슴은 고기 때문에 사냥되었는데, 함정에 빠뜨리거나 개를 이용하여 사냥했다.
가축 돼지와 멧돼지 모두 먹었다. 돼지고기는 아일랜드에서 가장 흔하게 섭취되는 고기였을 것이다. 돼지는 숲 속의 도토리로 살을 찌웠다. 갈고리에 걸린 베이컨 옆구리살(''Flitch of bacon'')은 자료에서 자주 언급된다. 소금에 절인 돼지고기로 만든 소시지도 언급된다. 'maróc'(노르웨이어 차용어)과 'indrechtán'(소시지 또는 푸딩)으로 알려진 두 가지 유형의 소시지가 언급된다.
농촌 경제의 주요 특징은 소 사육이었다. 소는 늙거나 다치지 않는 한 일반적으로 고기용으로 도축하지 않았지만, 수소는 황소가 될 운명이 아니면 종종 1~2년에 도축되었다.
소금에 절인 소고기는 다양한 스튜를 흔히 만들던 가마솥에서 끓였다. 고기는 나무 또는 철로 만든 꼬챙이(''bir'')에 구워 먹기도 했다. Aislinge Meic Con Glinne라는 시는 팥배나무 꼬챙이에 소고기, 양고기, 햄 조각을 구워 먹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 고기는 먼저 소금과 꿀에 재워 두었다.
내장은 여러 가지 요리에 사용되었으며, 특히 양의 위가 가장 많이 언급된다.
생선도 때때로 불 위에 꼬챙이 또는 그리들에 구워 먹었다.
아일랜드의 종교적 식단에서는 말과 두루미 고기는 금지되었다. 일반적으로 가금류는 식단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았던 것 같다. 특정 집단이나 부족 사이에는 토템 동물과 관련된 금기 사항이 있었는데, 이러한 동물의 섭취는 금지되었다.

아일랜드는 일 년 중 10개월 동안 풀이 자라고 혹독한 겨울에도 소를 보호할 필요가 없어 항상 고품질 유제품을 생산해왔다. 유제품은 고대 아일랜드인의 식단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으며, 이는 고고학적 기록으로 뒷받침된다.[102]
유제품은 'bánbia'(흰 음식)로 알려졌으며, 우유, 버터, 치즈(curd), 그리고 치즈는 식단의 주식이었다. 'Táth'는 압착한 치즈의 일종으로, 아마도 파니르(paneer) 또는 코티지 치즈와 비슷했을 것이다. 'Tánach'는 단단한 치즈를, 'mulchán'은 탈지유 치즈를 가리켰다. 우유나 부드러운 단맛의 치즈를 버터와 함께 가열하여 'milseán' 또는 'millsén'이라고 하는 달콤한 음료를 만들었다.[103] 물로 희석한 우유는 'englas'라고 불렸다.
소의 피를 뽑아 우유와 버터와 섞는 관행(마사이족(Maasai people)의 관행과 유사함)은 드물지 않았다. 블랙 푸딩(Black pudding)은 피, 곡물(보통 보리), 그리고 양념으로 만들어지며, 아일랜드에서는 여전히 아침 식사의 주식이다.[104]
꿀은 귀중하지만 풍부한 상품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양봉은 특히 교회와 관련이 있었고 의학에서 많이 사용되었다.
늪 버터(Bog butter)는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해 늪에 묻어 발효시켰는데, 이는 무산소 환경에서 안정적인 온도를 제공하여 숙성 과정을 촉진한다. 최종 제품은 북아프리카 요리의 많은 재료인 스멘(smen)과 비슷했을 것이다.
아일랜드에서 재배하고 먹었던 채소로는 양파, 차이브, 양배추, 셀러리, 야생 마늘, 그리고 부추가 있다. 흰명아주 (''Chenopodium album'')는 노르만인 이전의 고고학 유적지에서 자주 발견되며, 북인도에서 지금도 그러하듯이 아일랜드 식단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스키릿 (''Sium sisarum''), 아일랜드어로 'cearrachán'이라고 하는 이 뿌리채소는 재배되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현재는 사용되지 않는다. 겨자냉이, 소렐, 파슬리, 그리고 쐐기풀은 야생에서 채취하여 날것으로 먹거나 수프에 넣어 먹었다.
사과, 배, 체리, 그리고 자두가 가장 흔하게 먹었던 과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완두콩, 넓적콩, 그리고 렌틸콩과 같은 콩류는 초기 중세 시대부터 재배되어 말렸고, 노르만인 시대에 흔해졌다. 딸기류와 견과류도 널리 먹었다. 개암 (Hazelnut)은 매우 중요했다. 빌베리 (Bilberries), 아일랜드어로 'fraochán'으로 알려진 이것은 전통적으로 8월 Lúghnasa 축제 때 채취했다. 블랙베리 (blackberries)와 다른 야생 과일들도 채취하여 먹었다.
후추는 초기 기독교 시대부터 아일랜드에 알려져 있었으며, 로마 제국으로부터 수입된 것이었다.
아일랜드어로 'caithne'로 알려진 스트로베리 나무 (''Arbutus unedo'')의 열매는 종교 시설과 관련이 있으며, 약을 만들거나 맛을 내는 데 사용되었을 수 있다.
발효유는 아일랜드 음료이다.
맥주는 귀족 집안의 필수품이었으며, 보통 보리로 양조되었지만 밀 맥주도 만들어졌다. 맥아 건조로는 아일랜드의 고고학 발굴에서 흔히 발견되며, 초기 기독교 시대부터 등장한다.[105]
'''Uisce beatha'''(물의 생명) 또는 위스키는 게일족 세계의 발명품이며, 12세기 증류 기술이 도입된 후 개발되었다.[106]
엄격한 수도회에서는 채식이 알려져 있었지만, 의무는 아니었다. 하지만 고기를 먹는 수도사들은 야생 돼지나 사슴만 먹도록 허용되었다. 수도사들은 물이나 우유와 곡물로 만든 죽과 같은 'brothchán'을 주식으로 삼았다. 일요일과 축제에는 제철 과일과 견과류, 꿀을 첨가했으며, 'brothchán'이 초기 형태의 뮤즐리일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101]
초기 아일랜드 문학에는 음식과 음료에 대한 많은 묘사가 나타난다. 특히 꿀과 벌꿀주는 식사 장면에 자주 등장하는 음식이지만, 실제로는 매 끼니마다 그것들을 먹을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아일랜드에서는 풀라흐트 피아드(Fulacht fiadh영어)라고 불리는 청동기 시대의 조리 유적이 발견되었는데, 돌구이를 이용하여 사슴고기 등을 삶았다고 한다. 맥주 양조에 사용했다는 설도 있다.
더블린 해안의 바이킹 유적에서는 당시 식생활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고기는 소, 돼지, 양, 닭 및 거위와 물고기. 개암나무를 대표로 하는 견과류와 야생 베리. 곡물은 메밀과 명아주의 씨앗을 죽으로 만들어 먹었다고 한다.
3. 감자
16세기 중반 감자가 아일랜드에 처음 소개되었을 때는 식용이 아닌 정원용으로 재배되었다. 그러나 감자는 비타민과 미네랄이 풍부하여 빈민층의 주식으로 급부상했다. 우락유와 함께 요리하거나, 돼지고기를 넣고 수프로 끓여 겨울철에 먹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섭취되었다.[203][202]
1620년대부터 감자는 아일랜드인의 식탁에서 주식으로 자리를 굳혔다.[203][202] 감자는 단위 면적당 생산량이 높아 척박한 환경에서도 잘 자랐고, 비타민 C를 비롯한 영양소도 풍부했다. 당시 아일랜드인들은 주로 감자와 버터밀크를 곁들여 먹었다.
그러나 감자에 대한 높은 의존도는 1739년 대기근과 1845~1849년 대기근에서 볼 수 있듯이, 감자 수확량 감소에 취약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특히 1845년 감자 역병으로 인한 대기근은 아일랜드 인구의 급감과 대규모 이민을 초래했다.[175]
3. 1. 감자 요리
아일랜드에 감자가 16세기 중반에 처음 들어왔다고 전해진다. 처음에는 식용이 아니라 정원용으로 심었으나, 빈민층에 의해 주식으로 급부상했다. 비타민과 미네랄이 풍부하여 우락유와 함께 요리해 먹거나, 돼지고기와 함께 수프로 만들어 먹었다.[203][202]1620년대부터 감자가 아일랜드의 주식으로 자리 잡으면서 다양한 감자 요리가 생겨났다. 빵은 포테이토 롤(potato roll)을 먹고, 곁들임 요리(사이드 요리)로는 으깬 감자와 볶은 양배추로 만든 콜캐넌(colcannon), 익힌 감자와 생감자를 섞어 팬케이크처럼 만든 박스티(boxtee), 감자와 베이컨, 양파 등을 포일에 싸서 석탄불에 굽는 호보 포테이토(hobo potato)를 먹는다.[204]
특히 콜캐넌은 미국 핼러윈 축제의 기원이 된 삼하인(Samhain)이라는 명절에 즐겨 먹는 음식으로, 기근의 상징인 붉은 마녀의 죽음을 기리며 먹는다. 으깬 감자와 파를 이용해 만든 챔프(champ)와 파이처럼 잘라 먹는 팬케이크 모양의 팻지(fadge)도 아일랜드인들이 즐겨 먹는 감자 요리이다.[204] 아일랜드의 최대 명절인 세인트 패트릭스 데이(St. Patricks Day)에 즐겨 먹는 요리 대부분은 감자 요리이다.


아일랜드의 대표적인 감자 요리는 다음과 같다.
- 복스티(Boxty)—감자 팬케이크
- 챰프(Champ)—주요 재료: 으깬 감자, 쪽파, 버터, 우유
- 콜캐넌(Colcannon)—주요 재료: 으깬 감자, 케일 또는 양배추, 버터
- 셰퍼드 파이(코티지 파이) – 주요 재료: 으깬 감자, 양고기 또는 쇠고기 다진 고기, 채소[193][194]
감자에 대한 아일랜드인들의 의존도는 매우 높아서 감자 수확에 민감했다. 16~17세기 기근 때 많은 피해를 보았고, 1740~1741년 기근은 추운 날씨로 흉작의 피해를 보았다. 1845~1851년에는 감자역병으로 인해 대기근이 발생하여 최소 백만 명 정도가 아사했고 1백만 명 이상이 이민을 떠났다.[205][206]
3. 2. 아일랜드 대기근
16세기 중반 감자가 아일랜드에 처음 들어왔을 때는 식용이 아니라 정원용으로 심었다. 하지만 감자는 비타민과 미네랄이 풍부하여 빈민층의 주식으로 급부상했다. 1620년대부터 감자는 아일랜드 식탁의 주식으로 자리 잡았고, 다양한 감자 요리가 발달했다.[203][202]아일랜드인들은 감자에 대한 의존도가 매우 높았기 때문에 감자 수확에 민감했다. 16~17세기 기근 때 많은 피해를 보았고, 1740~1741년 기근 때는 추운 날씨로 흉작의 피해를 보았다. 1845~1851년에는 감자역병으로 인해 대기근이 발생하여 최소 백만 명 정도가 굶어 죽었고, 1백만 명 이상이 미국 등 타지로 이민을 떠났다.[205][206]
1840년경 약 900만 명의 인구 중 75%를 차지했던 빈곤층은 감자를 주식으로 삼았다. 감자는 단위 경작 면적당 생산되는 에너지량이 많고, 비타민 C를 포함한 여러 비타민과 미네랄의 좋은 공급원이었다.
1845년, 감자 역병을 일으키는 역병균이 퍼지면서 아일랜드 대기근이 시작되었다. 감자가 병들어 먹을 수 없게 되자, 이미 빈곤에 시달리던 많은 사람들이 더욱 깊은 빈곤에 빠졌다. 1845~46년 감자 역병으로 흉작이 들었고, 1847년에는 소량의 수확에 그쳤으며, 1848년에는 다시 흉작이 들었다.
굶주린 사람들은 병든 감자를 먹어보려 했지만, 심한 병에 걸렸다.[176] 그들은 계란, 새, 쐐기풀이나 별꽃과 같은 식물을 먹기 시작했다. 많은 농부들은 가축의 피를 뽑아 고기 대신 튀겨 먹었다. 가축 또한 영양실조 상태였기 때문에, 그들은 허브, 마늘, 귀리, 버터와 섞은 피를 연명 식량으로 사용했다.[177]
19세기 후반까지 신선한 고기는 가장 부유한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사치품으로 여겨졌다. 돼지는 베이컨을 위해 길렀고 "세금을 내는 신사"로 알려졌다. 감자는 추운 겨울철이 다가오기 전 도축하기 전에 돼지를 살찌우는 데에도 사용되었다. 도축된 돼지고기의 대부분은 겨울 동안 보관할 수 있는 햄과 베이컨을 만들기 위해 절였다.
주식 작물인 감자에 지나치게 의존한 결과, 아일랜드 사람들은 감자 수확량 부족에 취약했다. 1739년 대기근은 극심한 추위 때문이었지만, 1845~1849년 기근(아일랜드 대기근 참조)은 감자 역병 때문이었다. 기근 기간 동안 약 100만 명이 사망하고 100만 명 이상이 이주했다.[175]
식민지 시대 아일랜드는 잉글랜드에 대한 곡물과 육류 등의 식량 공급지로 이용되었고, 아일랜드 대기근 중에도 그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4. 현대의 아일랜드 요리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서구에서 흔히 접할 수 있는 현대적인 음식들이 아일랜드에 들어왔다. 피자, 카레, 중국 음식, 태국 음식 등이 일반적인 음식으로 자리 잡았고, 최근에는 중앙 유럽-동유럽, 특히 폴란드 요리가 재료의 접근성이 높아짐에 따라 등장하고 있다.
20세기 후반에는 전통적인 재료를 새로운 방식으로 다루는 새로운 아일랜드 요리가 등장했다. 이 요리는 신선한 채소, 생선(특히 연어와 송어), 굴, 홍합과 같은 조개류, 전통적인 소다 빵, 전국적으로 생산되는 다양한 치즈, 그리고 감자를 기반으로 한다. 아일랜드식 스튜, 코들, 아일랜드식 풀 브렉퍼스트, 감자 빵과 같은 전통 요리들은 인기를 되찾았다. Myrtle Allen은 이러한 태도와 방법의 초기 지지자였으며, 이 요리들의 개발과 홍보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181] 요리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면서 Ballymaloe Cookery School과 같은 학교들이 생겨났다.
피시 앤 칩스는 아일랜드에서 인기 있는 테이크아웃 음식이다. 아일랜드에서는 보통 "치퍼(chipper)"라고 부른다. 아일랜드 최초의 피시 앤 칩스는 1880년대 더블린에서 San Donato Val di Comino 출신 이탈리아 이민자 주세페 체르비에 의해 판매되었다. 그의 아내 팔마는 고객들에게 "''Uno di questa, uno di quella?''"라고 물었는데, 이 말은 "이것 하나, 저것 하나"라는 뜻으로 더블린 방언에 "원 앤 원(one and one)"으로 들어왔고, 이는 여전히 더블린에서 피시 앤 칩스를 가리키는 일반적인 표현이다.[182] Ulster, 특히 Northern Ireland와 County Donegal의 많은 지역에서는 피시 앤 칩스를 "피시 수퍼(fish supper)"라고 부른다. 음식을 파는 식당과 음식 자체는 북부 지역의 많은 곳에서 "치피(chippy)"라고 불린다.
패스트푸드의 확산은 비만을 포함한 공중 보건 문제를 악화시켰으며, 2012년 보고서에 따르면 32만 명에 달하는 아일랜드 어린이들이 비만 또는 과체중이 되었고, 이에 따라 아일랜드 정부는 패스트푸드 세금 도입을 검토했다.[183] 정부는 비만과의 싸움을 위해 텔레비전 광고 캠페인과 학교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했다.[184]
4. 1. 일반적인 음식
아이리시 브렉퍼스트는 베이컨, 달걀, 소시지, 살짝 구운 토마토 등으로 구성된 아일랜드의 아침 식사 양식이다. 대한민국의 순대와 비슷한 블랙 푸딩도 먹는다.[200][201]해산물 소비는 원래 많았으나, 최근 조개류 요리와 소비가 증가하는 추세이다. 굴은 축제 기간 동안 먹는 별미이며, 대구와 연어는 가장 많이 소비되는 생선이다.[195] 아일랜드 문학 작품에는 꿀이 예부터 많이 소비되었던 재료로 묘사된다.
바이킹이 더블린 인근과 아일랜드에 들어오면서 양, 소, 돼지, 야생 거위, 해산물 등 바이킹 민족의 식단이 상당 부분 도입되었다. 아일랜드인들은 유럽 내에서도 해산물을 선호하는 편이다.
중세부터 17세기 감자 도입 이전까지는 귀족 소유의 방목으로 생계를 유지했으며, 우유와 치즈, 오트밀과 보리가 주식이었다. 블랙 푸딩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도입되어 여전히 많은 가정의 아침 식사로 소비된다.
20세기에는 피자, 중국식 요리, 서아프리카 요리, 동유럽(특히 폴란드 요리) 등 유럽 타국가의 요리법이 도입되었다. 최근에는 인도, 중국, 동유럽 등 다양한 식재료를 슈퍼마켓에서 구할 수 있다.
패스트푸드의 급속한 성장은 대중의 보건 문제로 이어져 아일랜드의 심장마비 사망률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정부는 보건 문제 해결을 위해 교육에 나서고 있다.[183][184]
주식은 감자와 빵이다. 고기는 돼지고기를 중심으로 양고기와 쇠고기가 사용된다. 해산물로는 연어와 대구, 갑각류와 굴이 이용된다. 채소는 감자, 양배추, 양파 등 추위에 강한 작물이 사용된다.

전통 요리에는 감자와 유제품이 필수적이다. 콜카논(colcannon영어|cál ceannannga)은 양배추나 케일을 섞은 매시드 포테이토이고, 챔프(champ영어|brúitínga)는 우유에 삶은 다진 쪽파나 파슬리를 넣은 매시드 포테이토이다. 벅스티(boxty영어|bacstaíga 또는 arán bocht tíga)는 감자 팬케이크의 일종이다.
빵은 베이킹소다를 넣은 무발효빵이 주류이며, 소다 브레드(soda bread영어|arán sóidega)라고 불린다. 이 반죽을 둥글게 펼쳐 십자로 사등분하여 구운 것을 펄(farl영어)이라고 한다.
해조류를 먹는 습관이 있으며, 달스(dulse영어, 학명 ''Palmaria palmata'')는 챔프, 생선 수프, 스튜, 샌드위치 등에 사용된다. 아이리시 모스(Irish moss)(Chondrus crispus)로는 푸딩을 만든다.
해안선이 길지만 수산물 소비량은 유럽 평균을 밑돈다.[195] 과거 영국 통치하에 어선 소유가 제한되었고, 쇠고기 기반 경제, 금요일 금식일에 먹는 종교적 음식이라는 점, 빈곤과 식민지화의 부정적 기억 등이 원인으로 생각된다.[196]
골웨이(Galway)나 더블린(Dublin) 등 해안 도시에서는 수산물이 여전히 중요하며, 골웨이에서는 매년 9월 골웨이 국제 굴 축제(Galway International Oyster Festival)가 열린다.[197]
현대 아일랜드 해산물 요리의 예로 "더블린 로이어(Dublin Lawyer)"(위스키와 생크림으로 조리한 랍스터(lobster))가 있다.[198]
가장 많이 소비되는 어류는 연어류(Salmon)와 대구류(Cod)이며, 해조류(Seaweed)는 아이리시모스(Irish moss, *Chondrus crispus*) 또는 다시마(Dulse)가 자주 사용된다.[199]
4. 2. 전통 음식
아일랜드의 아침 식사는 베이컨, 달걀, 소시지, 살짝 구운 토마토 등으로 구성되며, 이러한 아침 식사 양식을 아이리시 브렉퍼스트라고 부른다. 한국의 순대와 비슷한 블랙 푸딩도 먹는다.[190][191]해산물 소비는 원래 많았으나, 최근 들어 조개류 요리와 소비가 증가하는 추세이다. 굴은 축제 기간 동안 먹는 별미이다. 대구와 연어는 가장 많이 소비되는 생선이다.[186]
아일랜드 신석기 시대 이전, 농업 기술 발달 전 아일랜드의 중석기 시대는 석기, 뼈 조립품, 고고식물학적 증거, 인간 골격 유적의 동위원소 분석, 인간 치아 마모 등의 고고학적 증거를 통해 다양한 식물과 동물을 섭취하는 수렵 채집 사회였음을 알 수 있다.[7][8][9] 뼈 조각[10]과 조개껍데기[11]는 중석기 시대 아일랜드인의 식생활을 이해하는 중요한 지표이다. 당시 식재료는 오래전에 분해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12] 특히 아일랜드 대부분이 산성 토양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더욱 그렇다.[13][14][15] 남아있는 식품 유적과 중석기 시대 식량 채취 도구,[16] 지역 환경과 유적지와의 관계[13]를 통해 당시 아일랜드인들이 무엇을 먹었는지 알 수 있다. 유적지는 중석기 시대 아일랜드인의 식생활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통찰력을 제공한다.[13] 예를 들어, 중석기 시대 유적지가 수계 근처에 위치한 것은 해양 생물 섭취를 시사한다.[17] 중석기 시대 아일랜드 유적지 대부분이 수계 근처에 있다는 사실은 식물, 해양 생물, 소형 포유류가 풍부한 식단을 암시한다. 이는 영국이나 북미 원주민과는 대조적인데, 이들의 내륙 유적지는 고기 중심의 식단을 암시하기 때문이다.[13][11] 사슴은 고고학적 발견에서 거의 나타나지 않는데, 이는 해안 지역, 만, 하구에서 사슴을 보기 어려웠기 때문으로 추정된다.[13]
이러한 유적지의 의도적인 위치 선정은 특정 식품에 대한 문화적 선호도를 보여준다.[11] 수계 근처 유적지의 특징적인 요소는 이매패류 껍데기의 거대한 더미인 쓰레기 더미인데, 이는 조개류가 중석기 시대 아일랜드인의 식생활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보여주는 명확한 증거이다.[18] 조개껍데기 더미는 아일랜드에서 자주 발견되는 중석기 시대 유적의 특징이며, 대부분 굴과 삿갓조개 껍데기로 구성되어 있다.[11] 슬라이고(아일랜드어 ''Sligeach'', "조개가 풍부한 곳"이라는 뜻)라는 해안 도시의 이름은 강과 하구에 조개류가 풍부했던 역사와 이 지역에 흔했던 조개껍데기 더미를 반영한다.[19][20]
아일랜드가 섬이라는 지리적 위치와 독특한 생물 다양성과 지형은 중석기 시대 아일랜드인들이 인근 지역 사람들과는 다소 다른 식단을 즐겼음을 시사한다.[21][22][9] 예를 들어, 선사 시대 아일랜드에는 소형 포유류가 부족했고,[23] 다른 중석기 시대 공동체에 중요했던 붉은사슴, 투우, 엘크와 같은 종이 없었다.[11][9][22] 이는 독특한 식생활과 영양 기준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멧돼지[24][9]와 같은 특정 종의 지속적인 증거는, 곰[25]이나 맹금류(중석기 시대 뼈 조립품에서 발견되었지만 인간 뼈의 동위원소 분석에는 나타나지 않음[9])와 같은 다른 동물 유해의 희소성이나 조리되지 않은 상태와 대조된다. 이는 특정 동물을 식량으로, 다른 동물은 (유럽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26][27]) 상징적이거나 약용으로 사용했음을 시사하며, 개와 같이 전혀 섭취하지 않았던 동물도 있다.[9]
아일랜드의 지리적 특성과 중석기 시대 유적지의 위치 때문에 중석기 시대 아일랜드인이 이용할 수 있는 식량 자원의 다양성은 독특했다.[11][13][9] 멧돼지를 제외하고, 늑대, 불곰, 스라소니와 같은 대형 포식자는 고고학적 조립품에서 드물게 발견되며, 대부분의 중석기 시대 유럽과 마찬가지로 식량으로 이용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11] 마찬가지로, 곡물은 소화를 위해 필요한 가공 과정 때문에 아직 섭취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지만, 균류, 뿌리, 잎, 줄기, 꽃, 견과류, 씨앗, 열매는 수확하고 먹기가 쉬웠을 것이며, 중석기 시대 식단에 영양적 다양성과 풍미를 더했을 것이다.[11]
이는 수로를 따라 위치한 유적지의 빈도와 결합하여 중석기 시대 아일랜드인의 주요 식량은 해양 및 식물성 식량이었음을 시사한다. 초기 중석기 시대 이주민에 의해 아일랜드로 가져온 멧돼지[24]가 동물 뼈의 고고학적 조립품에서 자주 발견된다는 것은 중석기 시대 아일랜드인 식단에서 또 다른 주목할 만한 주식이었음을 나타낸다.[10][9][24] 아일랜드의 습한 날씨와 산성 토양으로 인해 식물 기원 유물이 부족하지만, 인간 뼈의 생화학적 분석을 통해 사과, 넌틀베리, 산딸기, 블랙베리, 수련 씨앗, 덩이줄기, 개암과 같은 다양한 식물성 식량의 섭취를 증명할 수 있었다.[9][28]
중석기 시대 아일랜드와 영국에서 많은 고고학적 조립품에서 개암이 상당히 많이 발견된다는 것은 이 견과류가 중요한 식량이었음을 시사하며,[29][30] 같은 시대 캘리포니아 원주민들이 도토리를 사용했던 것처럼 화폐의 역할을 했을 가능성도 있다.[31] 특히 이 견과류는 겨울철에 땅속에 저장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32] 느릅나무 나무껍질 또한 영양이 풍부하여, 특히 스칸디나비아를 포함한 다른 북부 중석기 시대 유럽 공동체의 식단에서 중요한 식량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33]
아일랜드의 해안 지형에도 불구하고, 고고학적 유적에서 중석기 시대 아일랜드인의 해조류 채취에 대한 증거는 없으며, 심해 종에 대한 증거도 거의 없다.[34] 그러나 아일랜드 중석기 시대 식단에서 조개류와 연안 어류, 특히 연어과 어류의 존재는 주목할 만하다.[13] 물개에 대한 증거가 없는 것은 중석기 시대 스코틀랜드와 대조적인데, 스코틀랜드의 고고학 유적에서는 물개의 중요한 활용을 보여주는 증거가 있다.[34]
중석기 시대 아일랜드인들은 수렵 채집인들이었지만, 쓰레기 더미, 석기와 기술의 발견, 동물 유해의 계절적 분포는 생계 유지를 위한 환경 관리에 대한 이해를 암시한다.[11][9] 예를 들어, 선택적 사냥과 도태 기술을 통한 멧돼지의 이동과 관리[35][28]는 의도적으로 반가축화된 식량 자원이었을 가능성과 아일랜드 중석기 시대 공동체에 중요한 종이었음을 시사한다.[25][24] 쓰레기 더미의 구성에 대한 연구 또한 이 아일랜드 공동체가 조수의 행동과 각 해양 종의 최적 수확 시기를 이해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17][36] 다른 종류의 조개류는 홍합과 피조개의 경우 조간대 평지, 삿갓조개의 경우 바위 해안선과 같이 다른 환경 조건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다양한 종류의 조개류를 수확하고 이익을 얻기 위해서는 다른 수확 전략이 필요했을 것이다.[13] 또한, 아일랜드 중석기 시대 식단의 고고학적 증거에서 담수, 연안, 연안 해양 생물이 심해 종보다 더 많이 나타나는 것은 심해 사냥 기술 대신 함정과 그물과 같은 연안 어업 기술을 사용했음을 나타낸다.[13][37]
특정 유적지에서 발견된 석기와 석기판-조각과 같은 당시 유행했던 기술은 어류 함정과 같은 기본적인 식량 조달 기술의 건설 및 유지 관리에 있어서의 역할을 시사한다.[16][17][38] 중석기 시대 아일랜드인들이 적극적으로 달팽이 양식을 했을 가능성도 있다.[39]
중석기 시대 식단의 근본적으로 계절적인 성격[11]과 다양한 계절적 식량 채취 활동은 연중 중석기 시대 아일랜드인의 시간과 사회 조직에 영향을 미쳤다.[28] 이러한 활동에는 가장 풍부할 때 계절 식물과 동물을 사냥하고 채집하는 것과, 훈제[40]를 통해 고기와 해산물을 보존하고 견과류와 씨앗을 저장하는 것과 같은 저장 관련 활동이 포함되었을 것이다.[41] 다양한 식물은 1년에 두 번만 열매를 맺고 동물의 이동 패턴은 시간에 따라 변할 수 있기 때문에,[42][43][44] 이러한 식량 채취 활동은 매우 다양했을 것이며 따라서 환경과 동물의 행동에 대한 주의와 이해가 필요했을 것이다.[11]
대부분의 식량은 날것으로 먹었겠지만, 고고학적 증거는 조잡한 형태의 정육,[25] 씨앗의 침지,[45] 식품을 직접 가열하거나 훈제하는 열처리와 같은 중석기 시대 식품 가공 기술에 대한 통찰력을 제공한다.[40][46] 킬네티어니의 한 유적지에서 재, 탄 껍데기, 생선, 돼지뼈가 파낸 구덩이에서 발견되었는데, 생선뼈의 작은 크기는 꼬챙이에 구웠거나 뜨거운 돌 위에 직접 구웠음을 시사한다.[47] 탄 돌 더미의 존재는 삼발이 위에 세운 꼬챙이 위에서 벌어진 화염이나 흙난로에서 굽는 것과 같은 직접 가열 방법에 중점을 둔 요리 방법을 나타낸다.[48]
선사시대 아일랜드인들의 식생활에 대한 자세한 내용을 파악하기는 어렵다. 특히 아일랜드의 온화한 기후와 습하고 산성인 토양은 유기물을 빠르게 침식시키기 때문이다.[35][15] 하지만 인골과 토기 파편에서 발견된 생화학적 및 동위원소 분석 결과를 통해 신석기 시대 식단에 대한 통찰력을 얻을 수 있다.[49][50][14] 토기 용기의 점토 기질에 보존된 지질 및 식물 잔류물과 같은 생체지표[14]는 신석기 시대 아일랜드인의 식단에 다양한 동식물이 포함되었음을 보여준다. 여기에는 열매, 잎채소, 덩이줄기, 콩과 식물, 고기, 해산물, 견과류 등이 포함된다. 이러한 것들은 신석기 시대의 농업 발전, 즉 경작지,[51] 농기구, 가축 사육과 함께 선사 시대 아일랜드인의 식습관과 식사 행동의 극적인 변화를 보여주는 것으로, 중석기 시대 조상들과는 확연히 다르다.[50]
곡물 재배 및 가공과 농업 환경에서의 가축 사육은 새로운 음식, 특히 엠머밀, 보리, 쇠고기, 돼지고기, 염소고기의 소비 증가를 가져왔으며, 이는 해양 생물 소비의 급격한 감소와 일치한다.[53][14] 엠머밀은 습한 아일랜드의 날씨와 토양에 대한 내성이 강하기 때문에 선호되는 작물로 여겨졌지만, 호밀, 에인코른, 보리와 같은 다른 곡물의 증거도 발견되었다. 다만 그 양은 적었다.[50][54][55] 사탕수수, 옥수수, 수수, 건조한 초원 풀은 최근 몇 세기 동안 아일랜드에 도입되었으므로 신석기 시대 아일랜드인의 식단에는 없었다.[14] 마찬가지로, 귀리의 잔해가 발견되었지만, 유적지에서의 양이 미미하다는 것은 아직 재배되지 않은 야생 식물이었음을 나타낸다. 쇠고기와 양고기를 포함한 새로운 가축은 붉은 사슴과 함께 유럽 대륙에서 아일랜드로 가져온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57] 아일랜드 식단에서 새롭고 점점 더 중요한 종이 되었다. 예를 들어, 많은 양의 탄화된 소뼈가 발견된 울타리의 증거는, 아마도 대규모 공동 모임에서 많은 양의 쇠고기를 요리하고 섭취했음을 시사한다.[58][59][60] 중석기 시대와 마찬가지로 헤이즐넛은 많은 신석기 시대 유적지에서 여전히 흔하게 발견되지만, 청동기 시대로 갈수록 그 존재감은 줄어든다.[49][50]
농업 경영의 도입은 아일랜드 공동체의 새로운 식량 기반에 큰 영향을 미쳤다.[50] 농작물에 대한 관심이 높아짐에 따라 야생 채집의 소비는 감소했지만,[49] 경작지 주변에서 번성하는 새로운 야생 식물에 대한 채집 기회도 생겨났다.[61]
신석기 시대 어망과 어도의 방사성탄소연대측정은 해양 생물의 소비를 암시하지만,[62][63] 발견된 식품의 고고학적 증거는 중석기 시대 아일랜드인의 해양 생물 소비와는 달리 수생 종의 소비가 급격히 감소했음을 보여준다.[53][64][14] 신석기 시대의 농업 발전은 가축, 곡물의 소비 증가와 함께 이러한 감소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정되며,[50] 다른 신석기 사회의 유사한 발전과 일치하는 매우 중요한 유제품의 도입도 영향을 미쳤다.[65][66][67][68][67][69]
북서 유럽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농업 방식은 윤작 방식이 아닌 장기적인 구획 관리에 초점을 맞추었으며,[50] 퇴비를 비료로 사용했다.[70][71][50] 요리, 물, 폐기물 관리에 대한 새로운 기술의 등장은 아일랜드어로 ''fulachtaí fia''라고 불리는 초승달 모양의 탄화된 돌무더기인 소각 구덩이의 빈도가 증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데, 이는 소각 및/또는 요리 장소의 잔해로 이해된다.[50][72] 그러나 이러한 모든 발전에도 불구하고, 발굴된 고고학적 유물 중에는 식기, 조리 도구 또는 기타 식사 도구가 눈에 띄게 없었다.[73]
청동기 시대(기원전 2000~600년) 아일랜드 요리에서는 직접 조리법과 간접 조리법 모두 중요한 특징이었다는 것이 알려져 있다. 전자는 도기, 꼬챙이 또는 표면 그리들(griddle)을 이용하여 음식을 조리하는 데 개방된 불을 사용한 반면, 후자는 주변 매개체(흙, 공기 또는 물)를 가열하여 음식을 조리하는 방법을 사용했다.[74] 아일랜드어로 ''fulachtaí fia''라고 불리는 초승달 모양의 타다 남은 돌 무더기의 방사성탄소 연대 측정 결과, 신석기 시대 초기에 등장하여 청동기 시대에 두각을 나타낸 아일랜드의 조리 유적의 잔해로 이해되고 있다.[72] 중세 시대 문헌에서 ''fulacht''라는 단어는 꼬챙이에 음식을 직접 굽는 것을 의미하지만, 그 기원은 주로 뜨거운 돌을 이용한 간접 조리법에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신석기 시대 유적에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75] 이는 적어도 용어와 그 파생어가 요리 행위를 가리킨다는 것을 시사한다.[76]
중석기 시대 유적의 특징인 타다 남은 돌 무더기와는 달리, 중석기 시대 이후 유적은 규암의 중요한 잔해가 특징적이다.[77] 가축의 유적과 가까운 곳에 있는 숯으로 덮인 돌 무더기 외에도 물을 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 구덩이가 함께 발견되었다.[40] 이러한 무더기에 속한 돌 중 대부분은 큰 사암 조각이며,[78][58] 가열된 후 물이 담긴 구덩이에 담그거나 땅속에 묻어 음식을 삶거나 찌거나 굽는 데 사용되었던 열 전도체로 이해된다.[79]
유럽 전역에서 비슷한 성격의 타다 남은 돌 무더기가 발견되었지만, 아일랜드에는 이러한 유적이 가장 많이 있어 당시 아일랜드 요리에서 간접 조리법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것을 시사한다. 이러한 무더기는 상당한 양의 돌을 특징으로 하는데, 수백 년 동안 반복적으로 사용되었고, 물을 적절한 조리 온도로 가열하는 데 필요한 돌의 양 때문으로 생각된다.[58] 이러한 기술은 당시 유럽 일부 지역에서 일반적이었던 증기탕을 만드는 데에도 이중으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높다.[80] 하지만 ''fulachtaí fia''는 일반적으로 상당한 양의 타다 남은 동물 잔해를 특징으로 하므로, 주로 조리 유적으로 사용되었음을 시사한다.[81] 이러한 유적은 특히 사냥꾼이 임시로 사용했던 조리 장소였을 것으로 여겨져 왔지만, 대부분의 ''fulachtaí fia''는 저지대 농경지 및 최적의 사냥 조건을 충족하지 못하는 유사한 환경에 위치해 있다.[81] 또한 이러한 유적에서 발견된 동물 잔해는 일반적으로 가축의 긴 상완골을 특징으로 하며, 고고학적으로 고기 생산과 관련이 있으며, 현장에서 동물을 가공하거나 도살하고, 해체하여 먹었다는 것을 시사한다.[81][83]
''fulachtaí fia''가 상부 구석기 시대 유럽에서 동물 사육의 발전과 함께 등장했듯이,[84] 열분해 기술은 새롭게 중요해진 가축에 대한 대응으로 등장했다.[40] 이는 모든 유적에서 게임 동물 잔해가 부족하고, 양, 돼지, 소 뼈가 널리 퍼져 있다는 점에서 더욱 강화된다.[85][40] 그렇다고 해서 여전히 중요한 적은 수의 사슴 뼈의 존재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83] 마찬가지로, ''fulachtaí fia''에서 해양 생물이 없는 것은[58] 가축의 소비가 증가했음을 시사하며, 생선이 가축과 관련하여 다르게 조리되었을 가능성도 있다.[86][40] 많은 유적에서 말뚝 구멍 무리가 있는데, 이는 한때 삼각대와 꼬챙이를 지탱하여 최근에 죽은 동물의 피를 빼내거나 조리하는 데 사용되었을 수 있다.[87]
청동기 시대의 고고식물학적 증거는 아일랜드의 온화한 날씨와 산성 토양으로 인해 부분적으로 회수하기 어렵지만,[40][35][15] 유적지에서 화석화된 헤이즐넛 껍질이 발견되었고,[58] 가축과 사람 모두에게 사료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느릅나무 껍질의 증거도 발견되었다.[48]
헤이즐넛은 기름을 생산하는 데 사용되었고, 그 과정에서 ''fulachtaí fia''의 가열된 물에서 삶아 천연 기름을 추출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기름은 물 표면에 쌓인 후 걷어내 사용하거나 보관했을 것이다.[74][88][58] 삶는 것이 청동기 시대의 주요 조리법이었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이 방법은 음식의 칼로리를 잘 보존할 수 있었다.[89][90] 예를 들어, 고기를 삶는 것은 린 고기의 수분을 유지하고, 거친 고기의 지방을 제거하며, 골수를 추출하는 데 선호되는 조리 방법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90]
앞서 언급한 대부분의 ''fulachtaí fia''와 함께 발견되는 긴 얕은 구덩이는 일반적으로 돌, 목재 및 기타 유기물과 같은 단열재로 둘러싸여 있으며,[91] 뜨거운 돌과 식용 재료를 분리하거나 다양한 종류의 음식을 분리하기 위해 설계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칸막이로 나뉘어져 있다.[58] 샘 위나 근처에 있는 도랑의 위치와 땅에 새겨진 관개 수로와의 근접성으로 보아 깨끗한 담수를 선호했고, 사용 후 구덩이를 배수하는 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모래에 파거나 물 근원에서 제거된 다른 구덩이는 지하 오븐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58]
이러한 무더기의 일반적으로 큰 규모와 지형에서의 영속성은 개별 ''fulachtaí fia''가 자주 사용되었다는 것을 시사할 뿐만 아니라,[92] 크고 작은 사회 모임의 중심지였음을 시사한다.[93][58] 이는 많은 양의 동물 뼈의 존재,[59] 개발된 정착지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상당한 크기의 도랑(많은 양의 음식을 담았을 것으로 예상됨)[94] 등으로 더욱 강화된다. 음식을 준비하는 것과 이러한 화덕을 짓는 것은 오랜 시간 동안 여러 사람이 함께 일해야 완성할 수 있는 노동 집약적인 작업이었을 것이므로, 음식을 조리하는 것은 사회적 활동이었으며, 작업자들 사이에 책임이 분담되었고, 따라서 사회 구조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95][96]
의례 유적은 종종 기념품의 생산과 전시로 표시되므로,[97] 이러한 유적이 때때로 중요한 공동체 모임의 장소였을 것이라는 추측은 기념물, 돌 원형 및 기타 장례 이외의 유물의 발견으로 더욱 입증된다.[98] 마찬가지로, ''fulachtaí fia''는 주로 간접 조리법(직접 가열보다 훨씬 느리고 오래 걸리는 방법)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만들어진 구조물이므로, 이러한 무더기는 사람들이 오랫동안 함께 먹고 교류하며 시간을 보내기로 선택한 특별한 경우를 위한 장소였을 것이라는 추가적인 이유를 제공한다.[40]
접대는 모든 자유로운 토지 소유주들에게 의무 사항이었으며, 왕, 주교 또는 판사를 자신의 집에 환영해야 했고, 아일랜드인들은 누군가를 돌려보내는 것에 대한 더 광범위한 미신적인 두려움을 가지고 있었다. 초기 아일랜드 음식에 대한 많은 증거는 서기 7세기와 8세기부터 기록된 법률 문서와 시에 존재한다. 기독교의 도래는 또한 중동과 로마 문화로부터 새로운 영향을 가져왔다.
주요 식사는 오후나 저녁에 먹었다. 낮 식사는 ''díthat''이라고 불렸다. 밤의 식사, 특히 축하 식사는 ''feis''라고 불렸으며, 종종 맥주와 함께했다.[99] 주요 조리 도구는 다양한 수프와 스튜를 만들었던 가마솥 (''coire'')이었다.
식사는 빵, 신선한 우유 또는 ''bainne clabhair''와 같은 발효된 우유, 요구르트 또는 치즈와 같은 주식으로 구성되었으며, 보통 야채, 염장 고기 또는 꿀로 만든 ''anlann'' 또는 ''tarsunn''(곁들임, 조미료)이 함께 제공되었지만, 계절 식품의 어떤 종류라도 될 수 있었다. 공공 여관 (''브루이덴'')에서는 고위급 인물이 3개의 ''tarsunn''을, 하위급 인물은 1개의 ''tarsunn''을 받을 자격이 있었다.
두 개 또는 네 개의 손잡이가 있는 나무 컵인 메서 (아일랜드어로 ''meadar'')는 모임에서 공동 음주 용기로 사용되었다.[100]
고기는 일반적으로 신선하고 향신료를 넣지 않거나, 소금에 절여 가마솥에 삶았다. 때로는 꿀로 맛을 내거나, 테이블에 담아 찍어 먹기도 했다. 가마솥에 고기를 삶아 만든 스튜 형태의 요리에 대한 묘사가 많다. 한 가지 레시피에는 음식의 색깔을 내기 위해 "보라색 열매"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고기를 살짝 데친 후 나무 꼬챙이에 꿰어 불 위에서 굽는 방식도 있는데, 시시 케밥과 다소 유사하다.
고기 섭취는 수요일과 금요일, 그리고 사순절 동안 일주일에 두 번 금지되었다. 아일랜드어로 수요일을 뜻하는 ''Céadaoin''은 첫 번째 금식을 의미하고, 금요일을 뜻하는 ''Aoine''은 금식을 의미한다. 정교회에서는 아직도 이 관습을 유지하고 있다.
사슴은 고기 때문에 사냥되었는데, 함정에 빠뜨리거나 개를 이용하여 사냥했다.
가축 돼지와 멧돼지 모두 먹었다. 돼지고기는 아일랜드에서 가장 흔하게 섭취되는 고기였을 것이다. 돼지는 숲 속의 도토리로 살을 찌웠다. 갈고리에 걸린 베이컨 옆구리살(''Flitch of bacon'')은 자료에서 자주 언급된다. 소금에 절인 돼지고기로 만든 소시지도 언급된다. ''maróc''(노르웨이어 차용어)과 ''indrechtán''(소시지 또는 푸딩)으로 알려진 두 가지 유형의 소시지가 언급된다.
농촌 경제의 주요 특징은 소 사육이었다. 소는 늙거나 다치지 않는 한 일반적으로 고기용으로 도축하지 않았지만, 수소는 황소가 될 운명이 아니면 종종 1~2년에 도축되었다.
소금에 절인 소고기는 다양한 스튜를 흔히 만들던 가마솥에서 끓였다. 고기는 나무 또는 철로 만든 꼬챙이(''bir'')에 구워 먹기도 했다. Aislinge Meic Con Glinne라는 시는 팥배나무 꼬챙이에 소고기, 양고기, 햄 조각을 구워 먹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 고기는 먼저 소금과 꿀에 재워 두었다.
내장은 여러 가지 요리에 사용되었으며, 특히 양의 위가 가장 많이 언급된다.
생선도 때때로 불 위에 꼬챙이 또는 그리들에 구워 먹었다.
아일랜드의 종교적 식단에서는 말과 두루미 고기는 금지되었다. 일반적으로 가금류는 식단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았던 것 같다. 특정 집단이나 부족 사이에는 토템 동물과 관련된 금기 사항이 있었는데, 이러한 동물의 섭취는 금지되었다.
아일랜드에서 재배하고 먹었던 채소로는 양파, 차이브, 양배추, 셀러리, 야생 마늘, 그리고 부추가 있다. 흰명아주 (''Chenopodium album'')는 노르만인 이전의 고고학 유적지에서 자주 발견되며, 북인도에서 지금도 그러하듯이 아일랜드 식단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스키릿 (''Sium sisarum''), 아일랜드어로 ''cearrachán''이라고 하는 이 뿌리채소는 재배되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현재는 사용되지 않는다. 겨자냉이, 소렐, 파슬리, 그리고 쐐기풀은 야생에서 채취하여 날것으로 먹거나 수프에 넣어 먹었다.
사과, 배, 체리, 그리고 자두가 가장 흔하게 먹었던 과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완두콩, 넓적콩, 그리고 렌틸콩과 같은 콩류는 초기 중세 시대부터 재배되어 말렸고, 노르만인 시대에 흔해졌다. 딸기류와 견과류도 널리 먹었다. 개암 (Hazelnut)은 매우 중요했다. 빌베리 (Bilberries), 아일랜드어로 ''fraochán''으로 알려진 이것은 전통적으로 8월 Lúghnasa 축제 때 채취했다. 블랙베리 (blackberries)와 다른 야생 과일들도 채취하여 먹었다.
후추는 초기 기독교 시대부터 아일랜드에 알려져 있었으며, 로마 제국으로부터 수입된 것이었다.
아일랜드어로 ''caithne''로 알려진 스트로베리 나무 (''Arbutus unedo'')의 열매는 종교 시설과 관련이 있으며, 약을 만들거나 맛을 내는 데 사용되었을 수 있다.
해조류는 항상 아일랜드 식단의 중요한 부분이었으며 오늘날에도 인기가 있다. 인기 있는 두 가지 형태는 딜리스크(Ulster에서는 돌김으로 알려짐; ''돌김(Palmaria palmata)'')와 아일랜드 이끼(카라기난 이끼, ''카라기난(Chondrus crispus)'', ''Mastocarpus stellatus'')이다.
주식은 감자와 빵이다. 고기는 돼지고기를 중심으로 양고기와 쇠고기가 사용된다. 또한 해산물이 풍부하게 잡히기 때문에 생선으로는 연어와 대구, 그리고 그 외에 갑각류와 굴이 이용된다. 채소는 앞서 언급한 감자 외에 양배추와 양파 등 추위에 강한 작물이 사용된다.
특히 전통적인 요리에서는 감자와 유제품이 필수적인 재료가 된다. 콜카논(colcannon/아일랜드어: cál ceannann)은 양배추나 케일을 섞은 으깬 감자이다.
4. 3. 전통 음료
발효유는 아일랜드의 전통 음료이다. 메서(아일랜드어로 ''meadar'')는 두 개 또는 네 개의 손잡이가 있는 나무 컵으로, 모임에서 공동 음주 용기로 사용되었다.[100] 맥주는 귀족 집안의 필수품이었으며, 보통 보리로 양조되었지만 밀 맥주도 만들어졌다. 맥아 건조로는 아일랜드의 고고학 발굴에서 흔히 발견되며, 초기 기독교 시대부터 등장한다.[105] '''Uisce beatha'''(물의 생명) 또는 위스키는 게일족 세계의 발명품이며, 12세기 증류 기술이 도입된 후 개발되었다.[106]

아일랜드의 전통 음료는 다음과 같다:
종류 | 세부 종류 및 설명 |
---|---|
위스키 (특히 퓨어 팟 스틸 위스키) | 제임슨 아이리시 위스키, 패디 위스키, 부시밀스 등 |
포터 또는 스타우트 | 기네스, 머피스 아이리시 스타우트, 빔미시 스타우트 등 |
아이리시 레드 에일 | 스미스윅스 등 |
라거 | 하프 라거 |
아이리시 커피 | 강한 블랙 커피, 위스키, 설탕, 휘핑크림으로 만든다. |
아이리시 크림 | 베일리스 등 |
아이리시 미스트 | |
미드 | |
포틴 | 감자나 보리로 만든 매우 독한 (종종 수제) 증류주 |
사이다 | 매그너스/벌머스 등 |
갈색 레모네이드 | (주로 울스터 지방에서만 볼 수 있음) |
레드 레모네이드 | |
캐번 콜라 | |
맥데이드 풋볼 스페셜 | (주로 울스터 서부 지역에서만 볼 수 있음) |
아일랜드식 조식 홍차 | |
시도나 | |
타노라 | |
클럽 오렌지 |
5. 중세 아일랜드 (5세기-15세기)
아일랜드 신화와 초기 아일랜드 문학에는 핀 막 쿠말과 지혜의 연어 이야기처럼 음식과 음료에 대한 많은 언급이 있다.[5] 영웅의 몫과 가마솥, 꼬챙이에 구운 고기를 포함한 연회에 대한 내용이 많다. 아일랜드 신화는 켈트 인도유럽 전통이며 다른 문화의 이야기와 많은 음식을 공유한다. 예를 들어, 꿀은 항상 귀중하게 여겨졌으며, 아일랜드에서 인도에 이르기까지 많은 고대 인도유럽 신화와 의례에 등장하는 음료인 미드를 만드는 데 사용되었다.[6]
주요 식사는 오후나 저녁에 먹었으며, 낮 식사는 ''díthat'', 밤의 식사, 특히 축하 식사는 ''feis''라고 불렸고, 종종 맥주와 함께했다.[99] 주요 조리 도구는 다양한 수프와 스튜를 만들었던 가마솥(''coire'')이었다.[128]
식사는 빵, 신선한 우유 또는 ''bainne clabhair''와 같은 발효된 우유, 요구르트 또는 치즈와 같은 주식으로 구성되었으며, 보통 야채, 염장 고기 또는 꿀로 만든 ''anlann'' 또는 ''tarsunn''(곁들임, 조미료)이 함께 제공되었지만, 계절 식품이면 어떤 종류든 가능했다. 공공 여관 (''브루이덴'')에서는 고위급 인물이 3개의 ''tarsunn''을, 하위급 인물은 1개의 ''tarsunn''을 받을 자격이 있었다.
메서(아일랜드어로 ''meadar'')는 모임에서 공동 음주 용기로 사용되었다.[100]
고기는 일반적으로 신선하고 향신료를 넣지 않거나, 소금에 절여 가마솥에 삶았다.[128] 때로는 꿀로 맛을 내거나, 테이블에 담아 찍어 먹기도 했다. 가마솥에 고기를 삶아 만든 스튜 형태의 요리에 대한 묘사가 많다. 한 가지 레시피에는 음식의 색깔을 내기 위해 "보라색 열매"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고기를 살짝 데친 후 나무 꼬챙이에 꿰어 불 위에서 굽는 방식도 있는데, 시시 케밥과 다소 유사하다.
사순절에는 고기 섭취가 금지되었다. 정교회에서는 아직도 이 관습을 유지하고 있다. 사슴은 고기를 얻기 위해 사냥했다.
가축 돼지와 멧돼지 모두 먹었으며, 돼지고기는 아일랜드에서 가장 흔하게 섭취되는 고기였을 것이다. 돼지는 숲 속의 도토리로 살을 찌웠다. 소금에 절인 돼지고기로 만든 소시지도 언급된다. 농촌 경제의 주요 특징은 소 사육이었으며, 소는 늙거나 다치지 않는 한 일반적으로 고기용으로 도축하지 않았지만, 수소는 황소가 될 운명이 아니면 종종 1~2년에 도축되었다.
소금에 절인 소고기는 다양한 스튜를 만들던 가마솥에서 끓였다. 고기는 나무 또는 철로 만든 꼬챙이(''bir'')에 구워 먹기도 했다. Aislinge Meic Con Glinne라는 시는 팥배나무 꼬챙이에 소고기, 양고기, 햄 조각을 구워 먹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 고기는 먼저 소금과 꿀에 재워 두었다. 내장은 여러 가지 요리에 사용되었으며, 특히 양의 위가 가장 많이 언급된다.
생선도 때때로 불 위에 꼬챙이 또는 그리들에 구워 먹었다.
아일랜드의 종교적 식단에서는 말과 두루미 고기는 금지되었다. 일반적으로 가금류는 식단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지 않았던 것 같다. 특정 집단이나 부족 사이에는 토템 동물과 관련된 금기 사항이 있었는데, 이러한 동물의 섭취는 금지되었다.
중세 아일랜드(5세기~15세기)의 음식 문화는 도시 중심지의 발달로 인해 물리적, 사회적 기반 시설 모두 변화시키며 기존의 식량 시스템에 큰 영향을 미쳤다.[107][108][109] 특히 9세기와 10세기에 노르스인 마을이 등장하고, 12세기와 13세기에 앵글로-노르만인이 도착하면서 이 마을들이 성장함에 따라 인구 급증이 발생하여 외국 무역으로 인한 새로운 식량과 새로운 생산 방식이 유입되었다.[111][110] 특히 앵글로-노르만인들은 도시 정착을 장려하고 축제 시장을 열어[113] 지역 및 외국 상품의 꾸준한 거래를 촉진하는 상업 경제를 확산시켰다.[111][112]
기록된 문서는 일반적으로 창고 재고와 주요 상품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기 때문에, 도시 화장실에서 발견된 고고 식물학적 유적[147]은 야생 채취 식품, 수입 식품 및 정원에서 재배한 상품과 같이 상류층의 식단을 보충하고 시장에서 식품을 살 여유가 없는 사람들의 식단을 뒷받침하는 덜 일반적인 식품에 대한 추가적인 통찰력을 제공한다.[148][149][110]
맥주 양조는 14세기에 아일랜드에서 등장했고,[153] 맥주는 유통 기한이 짧아 수출입이 어려웠기 때문에, 맥주 양조는 당시 영양가 있는 식품으로 여겨졌던 것을 제공하는 도시 중심지의 중요한 산업이었다.[110]
과일, 견과류, 채소와 같이 빠르게 상하는 식품과 상업적으로 대량 생산되지 않는 식품은 역사 기록에 잘 나타나지 않지만,[149][151] 고고학적 증거에 따르면 이러한 식품은 아일랜드 식단에서 중요한 계절별 보충 식품이었다.
중세 시대의 과일과 허브 소비는 특히 건강상의 이유로 특정 과일이 처방되거나 피해짐에 따라 의학적 열기에 휩싸였다.[110]
과일과 채소의 부패하기 쉬운 성질은 소비자들이 보존 방법을 개발하도록 유도함으로써 소비 방식을 변화시켰다.[168] 요리와 발효 외에도 과일은 일반적으로 말리거나, 절이거나, 소금물과 꿀을 사용하여 장아찌로 만들었다.[169] 이러한 보편성은 결과적으로 많은 단맛과 짠맛 음식을 잼, 젤리, 차트니, 장아찌와 함께 먹는 관습을 가져왔다.[157][107]
7세기부터 아일랜드와 비스케이 사이의 포도주 무역에 대한 기록과 초기 아일랜드 문헌에서 교회 축제를 위해 특히 보르도에서 수입된 와인에 대한 언급이 있으며,[157] 12세기와 15세기 사이에 아일랜드, 프랑스, 영국 간의 와인 무역에 대한 상당한 증거를 확인할 수 있다.[174]
5. 1. 사회 계층과 음식
중세 아일랜드에서는 특정 계층에만 특정 음식을 허용하는 법률이 제정되었다.[123][124][125] 당시 아일랜드에서는 손님을 맞이하고 식사를 대접하는 관습이 강했기 때문에,[126] 다른 사람의 집에서 접대를 받는 사람들은 특정 음식을 제공받을 것으로 기대했다.[125] 손님이 특정 음식을 받을 자격이 있었는데도 제공받지 못했다면, 주인이 환대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고 비난할 수 있었고, 이는 처벌 대상이었다.[124]음식을 특정 계층에 지정하는 법률 문서는 주로 자유로운 남성 지주에 중점을 두었으며, 기혼 여성에 대한 언급은 일부에 그쳤다. 농민에게 어떤 음식이 허용되었는지는 설명하지 않는데,[123][124][125] 이는 농민이 반자유민으로 간주되어 지주에게 '소유'되었기 때문이다.[127][128][129] 따라서 농민은 환대의 음식이나 음료를 제공받을 자격이 없었다.[107] 범죄자와 수도사에게 허용된 '빈곤한 식단'에 대한 언급은 일부 있다.[130]
음식 지정은 구체적이었는데, 예를 들어 소고기의 특정 부위를 누가 먹을 자격이 있는지,[131][132] 어떤 양의 음식을 누구에게 제공해야 하는지 등을 결정하는 법률이 있었다.[125] 7세기와 8세기의 법률 문서는 7등급의 일반 시민과 3등급의 반자유 농민을 설명하며, 이러한 등급은 종종 더 세분화되어 관습법에 따른 사건을 판사가 처리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133][124][123] 외모만으로 계층을 구분하기 어려웠기 때문에,[134] 음식은 사회적 신호로 사용되어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사회적 지위를 구분하고 적절한 환대를 제공할 수 있었다.
특정 음식에 계층 지위를 부여함으로써 특정 음식은 사치스러운 것으로, 다른 음식은 평범한 것으로 인식되었지만, 이는 계층화된 사회의 여러 계층에 고유한 영양 기본 식품을 만들어냈다.[107] 예를 들어, 최하위 계층의 자유 시민은 보리, 귀리, 유제품을 마음껏 먹을 수 있었지만,[135][123] 그 위 계층의 시민은 구운 빵을 더 먹을 수 있었다.[125][135] 그러나 아일랜드에서 밀이나 호밀은 희귀하여 상류층만 먹을 수 있었기 때문에[118][136] 이러한 곡물은 허용되지 않았다. 사슴고기와 기타 사냥감 고기는 통제되지 않은 땅에서 얻은 야생 동물은 모든 계층에 접근 가능하므로 평범한 음식으로 간주되었다.[137][125] 이는 각 영주의 토지에 속한 소와는 달랐고, 소고기는 사유화되고 제한되어 더 귀중한 음식이었다.[107] 야생 물고기도 마찬가지였다. 모든 시민은 작더라도 그물이나 덫을 사용할 자격이 있었다.[107][110]
영양 섭취를 위해 부상, 임신, 월경,[138][139] 질병[140] 등 특별한 상황에서는 특정 음식이 계급 간에 이동할 수 있었다. 질병에 걸린 모든 자유인은 허브와 소량의 버터를 먹을 수 있었다.[107] 기혼 여성은 일반적으로 남편이 먹을 수 있는 양의 절반을 먹을 수 있었지만,[140][139] 임산부가 원하는 음식을 주지 않는 것은 처벌 대상이었다. 이는 유산을 예방하기 위한 부분적인 고려였다.[141] 이러한 법률 내 추가적인 영양 섭취 논리는 어린이에게는 부드러운 음식만 허용한다고 명시했다.[142][141] 부드러운 계란, 죽, 치즈, 유청[139] 등이 포함되며, 아버지의 계층이 허용된 재료(꿀이나 버터 등)만으로 장식해야 했다.[141]
종교 교리는 이러한 법률 문서에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일요일에는 더 관대한 규정이 적용되었고,[143][139] 상류층이 먹는 음식 중 일부는 하류층과 공유되었다.[107] 소, 염소, 양의 우유는 최하위 계층의 자유 시민부터 최고위층 귀족까지 모든 계층의 주식이었다.[107][67][68] 하지만 소와 염소 우유가 양 우유보다 더 높은 등급으로 간주되었다.[125] 일반적인 작은 새는 서민이 먹을 수 있었지만, 백조와 같이 더 크거나 희귀한 새는 왕족(특히 백조의 경우 여왕)[144]에게만 허용되었다. 더 큰 종의 더 큰 알도 양이나 크기가 더 큰 것들이 상위 계급에게 먼저 주어졌다는 기본적인 이유로 상류층에게만 허용되었다.[145][146]
5. 2. 종교와 음식
초기 아일랜드 음식에 대한 많은 증거는 서기 7세기와 8세기에 기록된 법률 문서와 시에 나타나 있으며, 기독교의 유입은 중동과 로마 문화로부터 새로운 영향을 가져왔다.[99] 고기 섭취는 수요일, 금요일, 그리고 사순절 기간 동안 금지되었는데, 아일랜드어로 수요일은 '첫 번째 금식'(Céadaoin), 금요일은 '금식'(Aoine)을 의미한다. 정교회에서는 아직도 이 관습을 유지하고 있다.[101] 종교적 식단에서는 말과 두루미 고기는 금지되었으며, 특정 집단이나 부족 사이에는 토템 동물과 관련된 금기 사항이 있어 해당 동물의 섭취가 금지되었다. 엄격한 수도회에서는 채식이 알려져 있었지만 의무는 아니었고, 고기를 먹는 수도사들은 야생 돼지나 사슴만 먹도록 허용되었다. 수도사들은 물이나 우유와 곡물로 만든 죽인 ''brothchán''을 주식으로 삼았으며, 일요일과 축제에는 제철 과일, 견과류, 꿀을 첨가했다. ''brothchán''은 초기 형태의 뮤즐리일 수 있다는 주장도 있다.[101] 중세 아일랜드(5세기~15세기)의 음식 문화는 도시 중심지의 발달로 인해 기존의 식량 시스템에 큰 영향을 받았으며,[107][108][109] 특히 앵글로-노르만인들은 도시 정착을 장려하고 축제 시장을 열어[113] 지역 및 외국 상품의 꾸준한 거래를 촉진하는 상업 경제를 확산시켰다.[111][112] 중세 아일랜드에서는 특정 계층에만 특정 음식을 허용하는 법률이 제정되었는데,[123][124][125] 이는 당시 아일랜드의 강한 환대 관습과 관련이 있었다.[126] 특정 음식을 특정 계층에 지정하는 법률 문서는 일반적으로 자유로운 남성 지주에 중점을 두었으며,[123][124][125] 농민은 반자유민으로 간주되어 환대의 음식이나 음료를 제공받을 자격이 없었다.[107] 종교 교리는 이러한 법률 문서에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일요일에는 더 관대한 규정이 적용되었고,[143][139] 상류층이 일반적으로 먹는 음식 중 일부는 하류층과 공유되었다.[107] 가톨릭 성체를 만드는 데 밀이 필수적이었기 때문에, 수도원에서는 특별한 밀 와플을 일요일에만 만들었다.[150]5. 3. 곡물과 유제품
아일랜드 문학 작품에는 예부터 많은 음식과 음료에 대해 설명하였는데, 이에 따르면 꿀이 예부터 많이 소비되었던 재료인 것으로 보인다.중세에서 17세기 감자가 들어오기 전까지 시골에서는 대부분 방목으로 생계를 유지하였는데, 대개는 귀족들의 소유였을 것이다. 우유와 치즈로 만들어 먹고 오트밀과 보리를 주식으로 먹었고, 블랙 푸딩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도입되었는데 여전히 많은 가정의 아침 식사 때 먹는다.
16세기 감자의 도입 이전까지, 오트밀, 밀, 보리와 같은 곡물은 죽이나 빵으로 요리되어 아일랜드인들의 주식을 이루었다. 가장 일반적인 빵은 갈아낸 오트밀로 만든 납작빵이었다. 이러한 납작빵은 ''차파티''처럼 매우 얇거나, 스코틀랜드에서 여전히 인기 있는 오트케이크처럼 두꺼울 수도 있었다.
가정용품으로는 반죽통 ''lasat'', 반죽판 ''lecc'', 솥뚜껑 ''lann'', 그리고 솥뚜껑 뒤집개 ''lainnéne''가 있었다. 오트밀이 가장 흔하게 사용되는 곡물이었지만, 밀로 만든 빵은 귀족 계급의 사치품으로 여겨졌다. 빵과 우유는 수천 년 동안 아일랜드인의 주식을 이루었다. 라틴어에서 유래한 ''tortine''은 작은 빵을 의미한다.
전통 죽은 오트밀, 보리 또는 밀가루를 물, 버터밀크 또는 우유와 섞어 부드러운 농도가 될 때까지 끓여 만든 음식이었다. 여기에 짭짤한 버터, 신선한 버터 또는 꿀을 곁들였다.[99]
빻은 밀과 데운 우유를 발효시켜 프루멘티 또는 터키의 ''타르하나''나 중동의 ''카쉬크''와 비슷한 제품을 만들었다.[101] 계란 노른자와 같은 다른 재료를 첨가하여 영양가가 높은 음식을 만들 수 있었고, 말려서 겨울 동안 저장할 수도 있었다.
''menedach''로 알려진 또 다른 곡물 요리는 곡물과 버터를 반죽하여 반죽 형태로 만든 것으로, 특히 엄격한 참회식을 하는 수도사들에게 약효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것은 초기 형태의 루 또는 어쩌면 폴렌타의 한 종류일 수 있다. 빵에 발라 먹을 수도 있었다. 이것은 12세기 아이슬란드 사가 란드나마보크에 기록되어 있는데, 아일랜드 노예들이 이 음식을 만들면서 갈증을 해소한다고 주장하는 내용이 있다. "''아일랜드 노예들은 곡물과 버터를 반죽하는 방법을 찾아냈고, 그것은 갈증을 해소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minapak이라고 불렀습니다.''"[99]
아일랜드는 일 년 중 10개월 동안 풀이 자라고 혹독한 겨울에도 소를 보호할 필요가 없어 항상 고품질 유제품을 생산해왔다. 유제품은 고대 아일랜드인의 식단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으며, 이는 고고학적 기록으로 뒷받침된다.[102]
유제품은 ''bánbia''(흰 음식)로 알려졌으며, 우유, 버터, 치즈(curd), 그리고 치즈는 식단의 주식이었다. ''Táth''는 압착한 치즈의 일종으로, 아마도 ''파니르(paneer)'' 또는 코티지 치즈와 비슷했을 것이다. ''Tánach''는 단단한 치즈를, ''mulchán''은 탈지유 치즈를 가리켰다. 우유나 부드러운 단맛의 치즈를 버터와 함께 가열하여 ''milseán'' 또는 ''millsén''이라고 하는 달콤한 음료를 만들었다.[103] 물로 희석한 우유는 ''englas''라고 불렸다.
소의 피를 뽑아 우유와 버터와 섞는 관행(마사이족(Maasai people)의 관행과 유사함)은 드물지 않았다. 블랙 푸딩(Black pudding)은 피, 곡물(보통 보리), 그리고 양념으로 만들어지며, 아일랜드에서는 여전히 아침 식사의 주식이다.[104]
꿀은 귀중하지만 풍부한 상품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양봉은 특히 교회와 관련이 있었고 의학에서 많이 사용되었다.[99]
늪 버터(Bog butter)는 안전하게 보관하기 위해 늪에 묻어 발효시켰는데, 이는 무산소 환경에서 안정적인 온도를 제공하여 숙성 과정을 촉진한다.[72] 최종 제품은 북아프리카 요리의 많은 재료인 ''스멘(smen)''과 비슷했을 것이다.

- 바름브랙(Barmbrack) – 건조과일을 섞어 굽는 빵 또는 케이크. 금반지 등을 넣어 구워 점을 치는 풍습이 있다. 할로윈(Halloween) 무렵에 먹는다. ''Bairín Breac''Bairín Breac|바린 브렉ga
- 워터포드 브래드(Waterford blaa) – 아일랜드 남동부 워터포드(Waterford)의 향토 음식. 단단하게 구운 것과 부드러운 것이 있다.
- 구디(Goody)Goody|구디영어 – 빵 푸딩
- 오트밀 케이크(Oatcake) – 오트밀을 주원료로 하여 단단하게 구운 비스킷 모양의 납작한 빵. 플랫브레드의 일종.
- 감자빵 – 밀가루에 감자를 섞어 굽는다.
- 소다 브레드 – 효모를 사용하지 않고 만든 빵[192]
- 소다 퍼(Soda farl) – 납작하게 구운 소다 브레드. 북아일랜드의 향토 음식으로, 알스터(Ulster), 도니골주(County Donegal) 동부에서 이니쇼웬(Inishowen)Inishowen|이니쇼웬영어에 이르기까지 전해진다.
- 통밀빵 – 통밀가루로 구운 소다 브레드.
- 맥아빵(Veda bread)Veda bread|베다 브레드영어 – 북아일랜드에서 생산하는 밀가루 빵. 영국에도 같은 이름의 상품이 있지만 당밀을 사용하여 풍미가 완전히 다르다.
5. 4. 과일, 채소, 견과류
아일랜드의 습한 날씨와 산성 토양 때문에 식물 기원 유물은 보존되기 어렵지만, 인간 뼈의 생화학적 분석을 통해 사과, 넌틀베리, 산딸기, 블랙베리, 수련 씨앗, 덩이줄기, 개암과 같은 다양한 식물성 식량을 섭취했음을 알 수 있다.[9][28]중석기 시대 아일랜드와 영국에서 발견된 많은 고고학적 유물에서 개암이 상당히 많이 발견된다는 것은 이 견과류가 중요한 식량이었음을 시사한다.[29][30] 이는 같은 시대 캘리포니아 원주민들이 도토리를 사용했던 것처럼 화폐의 역할을 했을 가능성도 시사한다.[31] 특히 이 견과류는 겨울철에 땅속에 저장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32] 느릅나무 나무껍질 또한 영양이 풍부하여, 스칸디나비아를 포함한 다른 북부 중석기 시대 유럽 공동체의 식단에서 중요한 식량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33]
중세 아일랜드에서는 특정 계층에만 특정 음식을 허용하는 법률이 제정되었다.[123][124][125] 7세기와 8세기의 법률 문서는 7등급의 일반 시민과 3등급의 반자유 농민을 설명하고 있으며, 이러한 등급은 종종 더 세분화되어 관습법에 따른 사건을 판사가 처리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133][124][123]
아일랜드에서 재배하고 먹었던 채소로는 양파, 차이브, 양배추, 셀러리, 야생 마늘, 부추가 있다. 흰명아주(''Chenopodium album'')는 노르만인 이전의 고고학 유적지에서 자주 발견되며, 북인도에서 지금도 그러하듯이 아일랜드 식단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던 것으로 보인다. 스키릿(''Sium sisarum'')은 아일랜드어로 ''cearrachán''이라고 하는데, 재배되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현재는 사용되지 않는다. 겨자냉이, 소렐, 파슬리, 쐐기풀은 야생에서 채취하여 날것으로 먹거나 수프에 넣어 먹었다.
사과, 배, 체리, 자두는 가장 흔하게 먹었던 과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완두콩, 넓적콩, 렌틸콩과 같은 콩류는 초기 중세 시대부터 재배되어 말렸고, 노르만인 시대에 흔해졌다. 딸기류와 견과류도 널리 먹었다. 개암(Hazelnut)은 매우 중요했다. 빌베리(Bilberries)는 아일랜드어로 ''fraochán''으로 알려져 있는데, 전통적으로 8월 Lúghnasa 축제 때 채취했다. 블랙베리(blackberries)와 다른 야생 과일들도 채취하여 먹었다.
아일랜드어로 ''caithne''로 알려진 스트로베리 나무(''Arbutus unedo'')의 열매는 종교 시설과 관련이 있으며, 약을 만들거나 맛을 내는 데 사용되었을 수 있다.
6. 더 페일 (The Pale)
더 페일(The Pale)은 더블린 주변의 영국 영향력이 가장 강했던 작은 지역으로, 노르웨이, 영국, 아일랜드의 영향이 혼합된 독특한 식문화가 발전한 곳이다.
더블린 우드 퀘이 지역의 바이킹 유적지 발굴 조사를 통해 당시 주민들의 식생활에 대한 상당한 정보가 얻어졌다. 주요 육류는 쇠고기, 양고기, 돼지고기였다. 가금류와 회색기러기, 생선, 조개류도 흔했으며, 다양한 토종 열매와 견과류, 특히 헤이즐넛도 섭취했다. 쇠무릎과 명아주 씨앗이 널리 발견되었는데, 이를 이용해 죽을 만들었을 가능성이 있다.
도시에는 빵을 굽는 오븐이 사용되었다. 11세기 더블린에서는 체리가 발견된 증거가 있다. 빵에는 때때로 아니스씨가 첨가되기도 했다.
7. 노르만족
12세기 노르만족의 침입은 토끼, 노루, 꿩과 같은 새로운 식재료를 아일랜드 식단에 추가했다.[1] 또한 파이크와 같은 일부 담수어를 들여왔을 가능성도 있다.[1]
노르만족의 침입은 아일랜드에 영국과 프랑스의 영향이 시작된 것을 의미하며, 이는 노르만족이 정착한 지역과 도시에서 독특한 히베르노-노르만(Hiberno-Norman) 문화가 발전하면서 지속되었다.[1] 노르만족 요리는 매콤한 육류와 가금류, 포타주(potage), 브로스(broth), 구이 요리, 소스가 특징이었다.[1] 노르만족은 사과주 제조법도 들여왔을 가능성이 있으며, 굴과 가리비도 즐겨 먹었다.[1]
8. 식민지 시대와 아일랜드계 미국인의 요리 변화
아일랜드 대기근 이후 많은 아일랜드 여성들이 빈곤을 벗어나기 위해 미국으로 이주했으며, 아일랜드에서는 흔하지 않던 다양한 고기와 농산물 등 새로운 재료와 음식에 접하게 되었다.[178] 이들은 미국에서 가정부로 일하면서 미국의 상류층 입맛에 맞게 요리를 조절해야 했다.
처음에는 아일랜드 여성들이 아일랜드에서 흔히 먹던 음식과 재료에 집착했기 때문에 문제가 되었다. 이로 인해 아일랜드 여성들에 대한 많은 편견이 생겨났고, 많은 사람들이 이들이 자란 빈곤과 기근을 고려하지 않고 요리 솜씨가 부족하다며 조롱했다. ''Women's Journal''을 포함한 신문들은 아일랜드 여성들이 요리하는 법을 모르는 것처럼 보인다는 편견을 담은 기사를 실었다.[179]
가정부로 일하던 아일랜드 여성들은 점차 미국에 풍부한 재료들을 사용하는 경험을 쌓았고, 아일랜드 요리를 즐거움을 위한 음식으로 바꾸었다. 아일랜드와 달리 미국에서는 음식이 즐거움을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180] 그 결과, 전통적인 아일랜드 요리는 더 많은 고기와 과일을 포함하게 되었고, 아일랜드 음식이 싱겁다는 오명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아일랜드 요리에서는 돼지고기 사용이 일반적이지만, 미국으로 건너간 아일랜드계 이민자들에게 돼지고기는 구하기 어려웠고, 쇠고기가 적당한 고기였기 때문에 콘비프 이용이 일반화되었다. 콘비프와 양배추 찜(콘비프 앤 캐비지)은 미국의 성 패트릭의 날 음식으로 자리 잡았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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